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의 반 세기 전 이미..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제6권』, 이근배 옮김, 한길사
조르조 바사리(1511-1574)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은 너무도 유명해서 지난 500년간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책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바사리가 3세기에 걸친 이탈리아 문예 부흥의 역사를 200여 인물별로 정리한 역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이 방대한 책을 일찍이 1986년 미술사가도 아닌 의학자 이근배 교수(1914-2007)가 완역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1986년 탐구당에서 나왔을 때부터 화제가 된 이 책은 한동안 절판되었다가 지난 2018년부터 2019년에 걸쳐 한길사에서 복간되었다. 전면 컬러 도판에 역자와 교분이 있던 고종희 교수가 작가마다 해설을 곁들여 초심자의 이해를 도왔다.
워낙 널리 알려진 책이라 문외한인 내가 새로 독후감을 쓰는 것이 주제넘지만, 딱히 제6권을 골라 더하고 싶은 얘기를 적는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를 워낙 존경했기에 그를 당대 예술의 정점이자 궁극으로 삼았고, 제5권에서 장문에 걸쳐 거장을 다루는 것으로 일면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듯하다. 일반 독자라면 거기까지 읽었다고 해도 대단할 것이다. 그런데 대장정은 제6권으로 이어진다. 바사리 자신을 비롯한 당대 피렌체의 미술가들을 짧게 다루는 가운데 가장 중심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1565년 거행된 메디치 가문의 프란체스코 공자와 오스트리아 요안나 공주의 결혼식 기록이다. 역자가 이 지루한 부분을 빼지 않고 모두 번역한 것이 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다.
바사리는 이듬해 열린 결혼식 축하연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 자신이 400여 예술가를 감독해 만든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바사리의 기록은 우리로 치자면 국가적인 행사를 모범으로 정리한 의궤(儀軌)에 해당한다. 가령 1795년 정조대왕 <화성능행차반차도>가 조선 후기 왕실 행차의 규모와 내용, 의의를 상세하게 살필 수 있게 하듯이 바사리의 정리 덕에 피렌체 공국의 혼사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당대 제일의 잔치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일찍이 해외에서는 A. M. 내글러의 『메디치 가문의 극장 축제 1539-1637 Theatre Festivals of the Medici, 1539-1637』나 제임스 M. 새슬로의 『1589년 메디치 결혼식: 세계의 극장으로서 피렌체 축제 The Medici Wedding of 1589: Florentine Festival as Theatrum Mundi』와 같은 책들이 극장 예술의 부흥을 따로 떼어 다뤘다. 쉽게 말해 이런 연구가 바로 ‘오페라 예술’의 시원(始原)에 대한 것이다.
21세기 초까지는 최초의 오페라를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가 1607년에 작곡한 <오르페오>로 여겼다. 그러나 몬테베르디의 음악은 효시라고 보기엔 너무도 완벽하다. 물론 그 앞에 야코포 페리가 쓴 <다프네, 1597>와 <에우리디체, 1600>가 기록으로 전하지만, 불과 10년 사이에 몬테베르디와 같은 걸작이 나왔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르네상스 음악 연구가 확대되면서 점차 당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그의 부친은 미켈란젤로의 친구였다)의 <영혼과 육체의 묘사Rappresentatione di anima et di corpo, 1600>는 <오르페오>에 앞서는 극음악의 일례이다. (아래 링크 참고)
그리고 이런 무대의 뿌리는 바로 메디치 가문의 중요한 행사 때마다 열린 기념 공연에 있었다. 바사리 시대에 이런 축하 공연은 ‘인테르메디Intermedi’라 칭했는데, 우리 책에는 이를 ‘막간극’이라 옮겼다. 로마 시대에 아풀레이우스가 써서 첫 소설로 꼽히는 『황금 당나귀』, 그 가운데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를 16세기 최고의 시인과 음악가, 미술가가 집단 창작극으로 선보였다. 바사리가 기록한 글로 읽는 것보다 실제 공연을 본다면 훨씬 더 르네상스를 가깝게 느끼겠지만, 아쉽게도 이 무대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음악이 전하는 여러 메디치 축하연 가운데에는 1539년 코시모 1세와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의 결혼, 1589년 페르디난도 1세와 로렌의 크리스티네 공주의 결혼을 위한 막간극(인테르메디)이 가장 유명하다. 음반으로 듣는 메디치 축제는 실로 대단해서 눈으로 보지 않는 것까지 머릿속에 그리게 한다. 불과 반세기 만에 피렌체의 음악이 얼마나 풍성하게 발전해 갔는지 귀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그러면서도 급속도로 축적된 문화의 개가임을 증명해 준다.
몇 종의 음반에 더해 지난 2019년에는 피렌체 피티 궁전의 보볼리 정원에서 1589년 축하연 막간극 <순례 여인La Pellegrina>이 재연되었고 영상물로 나왔다. 페르디난도 공자는 바사리 축하연의 주인공 프란체스코 대공이 일찍 세상을 뜨고 뒤를 이을 동생이다. 그가 피렌체 공국 전성기의 마지막 주인공이다. 아내가 될 로렌의 크리스티네 공주는 프랑스 왕비가 된 카트린 드 메디치의 손녀이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메디치 가문의 장자 계열과 차자 계열이 다시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전하는 16세기 당대의 무대와 의상의 장관에 비하면 재연은 소박한 편이지만, 실제 피로연이 열린 공간에서 하객과 더불어 마련한 무대는 감동적이다.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제6권』은 미국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영 김의 특별기고로 시작한다. 한국계로 역자와 친분을 나눈 김 교수가 한국어 번역의 의의를 되짚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공부한 의학자가 ‘미술사의 바이블’을 모국어로 번역하기까지 과정은 또 하나의 르네상스적 업적이라 할 만한 것이다. 나는 3896쪽 전 6권을 마무리하는 맺음말을 역자의 글로 여기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7년 역자 사후에 진행된 복간의 내력을 보면서 그때야 이것이 또 다른 사람의 글임을 알아차렸다. ‘이영민’이라는 맺음말 필자에 대한 정보는 경향신문 리뷰(한국일보와 함께 복간을 다룬 단 두 신문이다)에 나온 게 유일하다. 그는 역자 이근배의 아들이다. 아마 현재 초로의 연배일 이영민은 오래전 부친이 번역할 때 신학교로 라틴어 원고를 들고 가 도움을 청하곤 했던 숨은 조력자였다. 부친 사후 새로 책을 내기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 또한 작지 않았다. 앞서 데이비드 영 김과 고종희에게 특별기고를 청한 사람도 그였다. 역자 이근배는 책 첫 페이지에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한 아내에게 헌사를 적었는데, 아마도 복간을 보았다면 아들의 이름을 더했으리라!
번역과 복간에 관여한 분들이 언젠가 모두 모여 1589년 막간극 <순례 여인> 가운데 감동적인 마지막 합창 ‘아폴로와 바쿠스의 강림: 오 얼마나 새로운 기적인가!’를 듣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