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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y 27. 2022

오래된 인형극의 주인 되기

1589년 메디치 결혼 잔치 막간극의 파장

아래는 여기에 기고한 글입니다.k 

1.

얼마 전 사석에서 <합창 교향곡>을 듣던 중 유명 프로듀서가 한 말. “베토벤이 지금 살았더라면 다른 장르의 음악을 했을 거야.” 나는 속으로 웃었다. “다른 장르의 음악은 또 뭔가? 미술이나 문학이 음악이 되는 건가?” 아마 베토벤이 자신처럼 대중음악 작곡가가 되었으리라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장르라는 단어가 제대로 쓰인 것인지 아닌지를 떠나 친구의 말이 틀리지는 않는다. 베토벤은 그때나 마찬가지로 가장 큰 명성을 가져다줄 음악에 매진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다른 장르에서, 가령 영화감독 같은 일을 할지 모른다. 물론 그러려면 귀는 들려야 했겠지만! 19세기의 베토벤은 자신의 영달만을 얻으려 하지 않고, 음악에 시대정신을 담는 데에 성공했기에 살아남았다. 그것은 곧 ‘계몽’이었다. 계몽은 유효기간이 없다. 아무리 깨어도 어둡기 때문이다.

귀 대신 눈을 감기로 한 카라얀

2.

잠시 뒤 왕년의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의 히트곡 ‘인형극의 주인Master of Puppets’이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려댄다. 학창 시절 친구 권유로 접했던 이래 줄잡아 35년 만에 듣는 곡이었다. 집에 와 유튜브에서 다시 찾아보니 조회 수가 수천만에 달하는 동영상에 각국에서 붙인 댓글이 더욱 흥미롭다. 맨 위에 누군가 “나는 75세인데, 내 장례식에서 이 곡이 연주되면 좋겠다”라고 하자, 수많은 호응이 따른다.  

- 우리 할아버지 하세요!

- 열네 살인데 할배처럼 되고 싶어요.

- 요즘 비버나 듣는 애들은 전설을 모른다.

이런 비버도 있다.

“200년 뒤에도 메탈리카는 전설일 것이다”라는 언급에 대한 반응이 더 흥미롭다.  

- 200은 아니고 70-100년 정도일 것이다.

- 베토벤은 아직 유명하지만 더는 듣지 않는다. 메탈리카가 더 위대하고, 서기 2200년대에도 여전히 유명할 것이다.

- 그렇진 않을 것이다.

-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 0을 하나 더 붙였어야지!

- 지구가 100년 이상 갈 것 같지 않다.

Metallica - Master of Puppets (Live) [Quebec Magnetic]

너나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려는 바람이 묻어난다. 100년 뒤에 베토벤은 잊혀도 메탈리카는 남으리라 주장하는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2020년 탄생 250주년을 맞아 나온 베토벤의 전집은 CD 118장이다(바흐나 모차르트는 그 곱절이다). 어떤 대중 음악가도 100집 가까운 앨범을 내지는 못했다. 지난 100년 동안 베토벤의 개별 작품 음반 판매량을 모두 합치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합창 교향곡> 음반이 몇 종이나 나왔겠는가?

물론 베토벤 관련 유튜브 동영상의 조회 수를 다 합쳐도 팝 그룹에는 못 미칠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교향곡은 한 곡이 CD 절반이나 한 장을 꽉 채운다. 바흐의 수난곡이나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한 곡이 CD 석 장 분량이다. 오늘날 한 작품으로 그만한 호흡을 유지할 대중 음악가는 없다. 이만큼 버거운 베토벤을 우리 시대에서 넘어선다면, 아니 어깨를 나란히만 한대도 기뻐할 일이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3.

마침 월간지 기사가 눈길을 끈다.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석권 이후 클래식이 많은 이에게 훨씬 가까워졌다”면서, “K팝의 위상이 올라가고 클래식의 문턱이 낮아졌음을 방증하는 콘텐츠가 이목을 끄는 세태”를 분석한다. K팝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클래식이 문턱을 더 낮춰야 할까? 계속해서 서울시향과 SM엔터테인먼트가 ‘장르’ 간 협업에 합의했고, 이는 영화 음악가 존 윌리엄스를 무대에 올린 빈 필하모닉의 선례와 나란한 행보라고 기사는 분석한다.  

여기서도 이른바 ‘클래식’과 ‘대중음악’은 다른 장르이기에 의미 있는 ‘콜라보’라고 지적한다. 나처럼 까칠한 독자가 아니라면 여러 곳에서 날아든 보도자료를 하나로 묶은 기자의 편집력을 높이 살 것이다. 콜라보는 상생(相生)이어야 하는데, 많은 경우엔 기생(寄生)처럼 보인다. 베토벤에 기생하고, K팝에 기생하고, 클래식에 기생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4.

평소 공들이는 수업에서 미켈란젤로의 삶을 그린 영화 <고뇌와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를 다시 뜯어보았다. 서사물의 간판격인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이 고전영화는 공중파 TV에서 녹화해 보던 시절부터 최근 선명한 블루레이 화질로 다시 나온 뒤까지 늘 깊은 인상을 준다. 수십 년 동안 내 수준도 깨나 높아져, 영화의 원작인 어빙 스톤의 소설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와 미켈란젤로를 다룬 연구서도 여럿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영화에서 새로운 대목을 접하고는 이탈리아에서 그의 작품을 직접 보았을 때 못지않게 기뻤다. 아름다운 궁전에서 연회가 열리는 가운데 미켈란젤로가 후원자인 메디치 친구들에게 교황과 티격태격한 일을 푸념한다. 희미하게 들리는 잔치 음악에 쫑긋 귀를 기울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 편곡했지만, 분명 1589년 피렌체의 젊은 대공 페르디난도가 먼 일가인 로렌의 크리스티네 공주와 결혼할 때 공연한 막간극 <순례하는 여인La Pellegrina>의 마지막 곡이다.

로마 메디치 궁전의 연회에서 울린 음악

1965년 영화가 나오기 직전 해에 미켈란젤로는 타계 400주기를 기렸다. 로마 전체에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다 할 만큼 고대의 영광을 부활시킨 미켈란젤로의 업적은 탁월했다. 영화의 원작인 스톤의 전기 소설은 1961년 출간되었을 때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스톤은 4년 간 로마에 머물며 미켈란젤로의 편지 500여 통을 토대로 소설을 썼고, 그의 조각 기법을 연구하기 위해 스탠리 루이스라는 캐나다 조각가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소설의 형식을 빌린 탓에 허구가 더해지기도 했고, 이를 다시 영화로 옮기면서 인물의 성격이나 시대상이 과장, 왜곡되기도 했지만, 소설과 영화를 통해 르네상스 거장의 면모가 ‘대중화’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동굴에 칩거하다가 각성하는 미켈란젤로: 분명 그의 시대와는 무관한 심포닉한 음악이다

영화는 <제3의 사나이>로 유명한 캐럴 리드가 감독했다. 그에게 음악을 작곡해준 사람은 앞서 <스파르타쿠스>,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서사물로 정평이 난 알렉스 노스였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영화 음악을 재즈로만 만들 만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던 노스는 16세기가 무대인 <고뇌와 환희>에서는 파이프오르간부터 고악기까지 오가는 화려한 관현악법을 구사했다. 사운드트랙은 미켈란젤로 시대에 국한하지 않고 수백 년의 양식을 자유롭게 넘나들었지만, 대부분 관객에게 음악의 시대성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켈란젤로 당대 음악은 1960년대에 거의 발굴되지 않은 채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과 교황의 미술품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라도 르네상스인이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에는 깜깜했다.     


5.

A. M. 나글러의 책 『메디치 극장 축제들, 1539-1637』이 나온 것이 바로 1964년이다. 일찍이 미켈란젤로의 후배 조르조 바사리는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의 마지막 권에 자신이 감독한 1565년 메디치 가문의 결혼 잔치를 상세히 기록했다. 나글러는 그 앞뒤로 거행된 가문의 중요한 피로연 축하 공연들로 시야를 넓혔다.  

이를 토대로 1589년 페르디난도 대공과 크리스티네 공주의 결혼식 막간극 <순례하는 여인> 전곡이 처음 녹음된 것이 1973년의 일이다. 한스 마르틴 린데와 에리크 에릭손의 첫 앨범 뒤로 이 곡은 거의 10년에 한 번꼴로나 새로 녹음될 만큼 대중의 관심과는 거리가 있었다.  

CD로 재발매된 1973년 첫 녹음

수많은 베토벤이 녹음되는 중에 1899년 앤드루 패럿, 1997년 파울 반 네벨, 2007년 스키프 셈페의 음반만이 메디치 가문의 축제를 기렸을 뿐이다. 물론 나에게는 하나하나가 르네상스 연주사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앨범이다.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마지막 노래가 울릴 때는 청량한 피렌체에 도착한 기분이다.

2007년 스키프 셈페 음반의 마지막 곡. 위 알렉스 노스의 영화 음악과 비교해 보라

2016년에 라파엘 피숑은 메디치의 여러 막간극을 섞어 <스트라바간차 다모레>라는 공연을 꾸몄고, 2019년 피렌체 피티 궁전 보볼리 정원에서는 1589년 막간극 <순례하는 여인> 잔치가 현대적으로 재현되었다. 발렌티나 빌라가 지휘한 이 공연은 음반과 영상물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문화 역량을 총동원했던 16세기 초연에 비하면 재연 영상물의 수준은 한참 미치지 못한다. 우피치 극장에서 첫 공연을 본 하객들은 천국이 열리는 듯한 의상과 노래와 춤의 나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2019년 재연 무대. 아쉬우나마 현장에서 다시 연주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순례하는 여인>은 피렌체가 자랑하는 일곱 작곡가 크리스토파노 말베치, 안토니오 아르킬레이, 루카 마렌치오, 줄리오 카치니, 조반니 데 바르디, 야코포 페리,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가 나눠 곡을 썼다. 대부분 문예 동아리 카메라타의 회원이었으며, 이곳에서 ‘오페라’라고 부르는 종합예술이 처음 탄생했음은 널리 알려졌다.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오페라는 페리가 1597년에 쓴 <다프네>이지만, 그 뿌리는 <순례하는 여인>과 같은 집단 창작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로 예술은 개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힘을 합쳤다. 우피치 극장 모델은 여러 이웃 도시로 뻗어나갔다. 피렌체 오페라는 화려한 볼거리로 군주를 찬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신보다 인간이 먼저’라는 인본주의 시대정신을 담는 데에 성공했기에 살아남았다. 베토벤도, 메탈리카도, 넷플릭스도 다 거기서 시작되었다.

 

6.

내가 영화 <고뇌와 환희>의 잔치 장면에서 들은 음악은 <순례하는 여인> 가운데 카발리에리가 쓴 마지막 곡 ‘이 얼마나 새로운 기적인가 O che nuovo miracolo’와 유사한 곡조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작업을 1508년에 착수했으니 카발리에리의 곡과는 80년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1973년 <순례하는 여인>이 처음 녹음되기 10년 전에 이미 알렉스 노스가 장면에 적합한 음악을 연구했다는 사실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2014년 디종 오페라의 피날레

재미있는 것은 작곡가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의 아버지 톰마소가 미켈란젤로의 친구였다는 점이다. 톰마소는 용모도 빼어났고 신체 건강했으며 품행도 모범이었다. 당연히 그는 미켈란젤로가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 속 울퉁불퉁한 근육의 모델이었다.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해 하늘로 데려가던 미소년 가니메데스나 아폴론의 아들 파에톤을 그린 스케치, 그리고 <최후의 심판> 가운데 그리스도 또는 그가 바라보는 사도 도마의 모델이 톰마소이다. 두 사람은 미켈란젤로가 156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이 차를 뛰어넘어 우정을 나눴고 건축가로 미켈란젤로를 돕던 톰마소는 친구의 임종을 지켰다. 아들 에밀리오가 자신의 음악이 아버지의 친구 미켈란젤로를 기리는 영화에 사용된 것을 알았다면 당연하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순례하는 여인>을 통해 르네상스 당대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 비극(사실상 오페라였다)에 버금가는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것처럼, 미켈란젤로의 업적을 다룬 <고뇌와 환희>(역시 오페라나 다름없다)를 통해 20세기는 메디치 예술가들이 만들었던 종합예술의 정점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7.

알렉스 노스나 <순례하는 여인>의 연주자들이 미켈란젤로 시대를 발굴하던 무렵 세계 음악의 중심은 비틀스였다. 록, 디스코, 발라드 등 대중음악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석권한 이들의 전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란히 등장한 밥 딜런은 반전과 인권이라는 가치의 전도사로 인정받아 2016년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나 같은 사람이 언급하는 것이 가당치 않을 만큼 많은 대중음악의 전설이 뒤를 이었다. 오늘날 빌리 아일리시와 BTS가 확고한 토대 위에서 경쟁한다. 작사, 작곡, 연기, 제작을 혼자 해내는 천재 린 마누엘 미란다는 뮤지컬 <해밀턴>을 힙합만으로 만들었다. 1589년 막간극 <순례하는 여인>과 경쟁하는 것이다. 브로드웨이와 안방극장의 오페라가 우피치 극장을 넘어설까?

힙합으로 만든 디즈니 뮤지컬 <해밀턴>의 예고편

우리가 뛰어넘을 허들은 비틀스보다 멀리 저 높은, 베토벤과 미켈란젤로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과 한 시대에 살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메탈리카와 다른 ‘장르’라는 좁은 식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장례식에 음악이 필요하다면 메탈리카나 베토벤 말고 그들과 경쟁하는 좀더 새로운 것이었으면 한다. 만일 우리 시대가 르네상스와 19세기를 뛰어넘지 못하면 언젠간 그 빛에 가릴 것이다. 흡사 좀비처럼 몸을 흔드는 헤비메탈 청중과 플라톤의 동굴에 묶인 듯이 부동자세로 200년 전 교향악에 빠져든 청중이 함께 각성하지 않는다면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초월에 성공해 과거와 나란히 빛난다면 우리는 ‘인형극의 주인’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주인도 또 다른 꼭두각시 일지 모르지만!

    

페르디난도 대공이 건설한 피렌체의 외항 리보르노Livorno. 이곳을 통해 수출된 토종닭은 레그혼Leghorn은 도시의 영어식 이름이기도 하다. 포박된 무어인 위의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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