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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r 22. 2022

신성한 의무인가, 그저 습관인가?

『예술하는 습관』을 읽고

예술하는 습관. 앨런 버넷. 고영범 옮김. 알마. 2021     

온라인 14,400원, 같은 제목 다른 책 주의!

작년에 출간된 『예술하는 습관The Habit of Art』은 2011년 국내에서도 공연된 희곡이다. 1934년생 영국 작가 앨런 버넷의 2009년 작이며, 버넷은 영화 <조지 왕의 광기>의 대본으로도 알려졌다. 『예술하는 습관』은 등장인물들이 <칼리반의 날Caliban’s Day>이라는 연극의 대본을 연습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극중극인지라 연극을 직접 본다면 이해가 쉽겠지만, 활자로는 극 중 인물이 되었다가 배우로 돌아왔다가 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다.


먼저 배우들이 연기하는 <칼리반의 날>은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두 예술가가 주인공이다. 계관시인 오든(W. H. Auden, 1907-1973)이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던 무렵 오페라 <베네치아에서 죽음>을 쓰던 작곡가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이 찾아온다. 두 사람에 대해 먼저 알면 『예술하는 습관』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T. S. 엘리엇에 이어 영국 시단을 이끈 오든은 삶도 남달랐다. 보수적인 엘리엇에 비해 오든은 좌파 성향의 동성애자였다. 미국 태생의 엘리엇이 영국으로 귀화했다면 영국인 오든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가 돌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했다. 한편 에드워드 엘가가 대영제국의 황혼을 장엄하게 받아들였다면, 손자뻘 브리튼은 모국이 서서히 침몰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전쟁의 위협을 피해 동성애 파트너였던 테너 피터 피어스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앞서 오든이 파트너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미국으로 떠난 것도 브리튼을 자극했다.


젊은 시절 오든과 브리튼은 의기투합했다. 브리튼의 오페라 <폴 번연>, 가곡집 <우리 수렵하던 선조들>, <이 섬에서>의 대본과 가사를 오든이 썼다. 오든도 음악가와의 작업에 흥미를 느껴 미국에 뿌리를 내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위해 오페라 <난봉꾼의 행각>의 대본을 맡았다. 올더스 헉슬리가 친구 스트라빈스키에게 추천한 젊고 재능 있는 시인이 오든이었다. 그 무렵 오든의 파트너는 체스터 칼먼으로 바뀌었고, 칼먼도 <난봉꾼의 행각>에 힘을 보탰다. 당시 만년의 스트라빈스키는 할리우드에 살았고, 독일 문호 토마스 만이 이웃이었다.

오든, 브리튼, 피어스

놀라운 것은 토마스 만이 동성애자 오든의 장인(丈人)이었다는 사실이다. 만은 반 나치 활동가이던 장녀 에리카를 영국으로 빼내기 위해 오든과 위장 결혼시켰다. 에리카도 동성애자였기에 혼인 당사자들도 흔쾌했다. 극 중 오든은 여러 차례 칼먼을 그리워하고 토마스 만이 장인이었음을 강조한다. 스트라빈스키는 브리튼의 멘토 가운데 하나였고 토마스 만은 오페라 <베네치아에서 죽음>의 원작인 소설을 쓴 사람이었다.


한편 브리튼도 초기 오든과 협력 이후 여러 문학 파트너와 작업하던 끝에 만년에 미반위 파이퍼(Myfanwy Piper, 1911-1997)를 만난다. 웨일스의 여성작가 파이퍼는 브리튼을 위해 『나사의 회전』, 『오언 윙그레이브』, 『베네치아에서 죽음』을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다. 오든과 브리튼의 만남으로 자연히 <베네치아에서 죽음>이 두 사람의 협업인가 추측하던 관객은 그것이 미반위의 작업임을 알게 된다. 얽히고설킨 관계를 알면 『예술하는 습관』의 행간에 함축한 의미를 만끽할 수 있다.

아니 이 귀한 걸 그냥 올려버렸네! 곤조 TV

이쯤 되면 읽기를 포기할 사람과 더욱 매달리고 싶을 사람으로 나뉠 것이지만, 아직 전부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폭풍The Tempest』도 중요하다. 오든과 브리튼의 만남을 그린 <칼리반의 날>은 『폭풍』의 어두운 존재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칼리반은 무인도를 다스리던 마녀 시코락스의 아들이다. 책만 읽다 권좌에서 쫓겨난 프로스페로는 갓 낳은 딸 미란다만 데리고 무인도에 도착해 시코락스를 죽이고 추물(醜物)인 칼리반을 수하로 부린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은 칼리반은 호시탐탐 미란다를 노리다 혼쭐이 나자 섬에 표류한 악당을 돕는다. 모두 프로스페로가 그린 큰 그림 대로이고, 칼리반은 그를 위한 미미한 도구일 뿐이다.

런던 올림픽에서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한 그 유명한 대목!

끝으로 오든과 브리튼 사이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험프리 카펜터(Humphrey Carpenter, 1946-2005)는 오든과 브리튼의 전기 작가이며, 국내에는 J. R. R. 톨킨의 전기로 알려졌다. 물론 세 사람의 만남은 가상이며, 오든이 부른 콜보이까지 많은 대사와 민망한 연기를 맡는다. 오든이 만년에 경피골막증을 앓았음에 착안한 작가는 ‘주름살’ 1과 2라는 희한한 캐릭터도 등장시키고, 급기야 ‘문장’과 ‘음악’도 의인화한다.

험프리 카펜터가 쓴 두 사람의 전기

극 중 브리튼이 오페라로 쓰는 중인 <베네치아에서 죽음>은 토마스 만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창작의 고통을 달래려 베네치아에 간 독일 저명 작가는 그곳에 휴양 온 폴란드 미소년에 빠진다. 결국 그는 아름다움에 탐닉해 콜레라가 퍼진 베네치아를 떠나지 않았다가 해변에서 죽음을 맞는다. 토마스 만뿐만 아니라 오든과 브리튼의 삶과도 겹치는 이야기에 대응해 콜보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오든은 계속해서 자신이 만의 사위임을 거론하고, 칼먼을 그리워하며 브리튼에게 피터(피어스)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나 <칼리반의 날>의 콜보이는 소설 속 폴란드 소년과 같은 절대미의 상징이 아니라 상류층의 치부가 걸러지는 여과지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칼리반에 해당한다. 심지어 전기 작가 카펜터도 존재감 이른바 ‘분량’ 면에서 콜보이보다 나을 것이 없다. 카펜터를 연기하는 배우는 리허설을 이끄는 무대 감독과 극작가에게 대사가 없는 중에 무대 위에 있는 편이 나은지 아닌지 묻는다. 어떻게든 주요 역할을 하고픈 것이다. 그러나 고객 가운데 옥스퍼드 주교도 있다는 콜보이의 언급에 카펜터의 자존감은 상처받는다. 그가 (현직인지 모르나) 주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무대 감독은 마침 급한 일을 보러 간 연출의 대타이다. 단역도 다른 연극 상연 중에 불려 와 잠깐씩 얼굴을 내민다. 극작가는 중견 배우의 텃세와 겨루느라 힘겹다. 오든 역의 배우가 대본을 검열하려 들기 때문이다. 배우는 왜 존경받는 계관시인의 치부가 이렇게 낱낱이 드러나야 하는지 이해 못 한다. 반면 작가에게 오든은 그저 ‘습관’처럼 예술을 했던 기이한 취향의 인물에 불과하다.


출판사 책 소개에는 “작가가 소외된 칼리반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라고 적혔다. <칼리반의 날>이 가상의 희곡이기에 모르겠지만, 나는 『예술하는 습관』을 매우 냉소적인 작품으로 읽었다. 이 적나라한 작품에 매여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모든 등장인물이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줄에 매인 꼭두각시이며 칼리반에 불과하다. 민낯을 본 사람들이 오든과 브리튼의 작품을 전처럼 마주할 수 있을까, 달리 보게 될까?

내가 너무 삐딱한가?

평소 관심 있는 인물들이기도 했지만, 요즘 시기에 이 희곡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가 동요하는 탓에 해당 국가 예술가들도 전에 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음악계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군림해 왔다.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가 대표적인 게르기예프 사단의 일원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나 백야 축제 같은 러시아 음악 행사도 게르기예프가 주관한다. 당연히 이들은 서방 무대에서 퇴출되었거나 활동이 위축되었다. 반면 우크라이나 태생이거나 러시아로부터 자유로운 음악가들은 반 러시아 정서를 확산하는 데 주력한다. 연대의 힘을 더하는 무대가 잇따르는 중이다.

늘 입장을 밝히라 요구받았던 쇼스타코비치 동무와 볼쇼이 극장을 사임한 소히예프

문제는 러시아에 한 발을 걸친 사람들이다. 서방은 이들에게 속내를 밝히라고 추궁했다. 이들이 러시아에 반대한다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강요할 문제일까? 결국 압력에 뜻을 밝히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대신한 사람들이 있다. 예술 작품과 예술가의 됨됨이는 오랜 논란의 대상이다. 살인까지 저질렀던 르네상스 작곡가 제수알도, 반 유대주의나 여성 편력으로 문제 삼는 바그너, 파시즘을 선동했던 이탈리아 시인 단눈치오 모두 예술사의 금자탑을 쌓았다. 이렇게 예술과 그 창작자의 삶에 너무 파고들다가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함 있는 예술가의 일급 작품과 훈훈한 인품을 가진 예술가의 이류 작품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그들에게 예술은 신성한 의무였는가, 그저 습관에 불과했는가?     


<후기>     


책을 조금 읽다가 보니 바로 연극 리허설을 소재로 한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이 떠올랐다. 영화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무대에 올리는 왕년의 은막 스타를 그린다. 그 또한 ‘액션 히어로’로 시대를 풍미했지만, 한물 간 지금은 캘리반과 같은 신세이다.

『예술하는 습관』을 번역한 고영범은 레이먼드 카버의 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역자는 책을 들고 문턱이 높을 독자를 위해 꼼꼼한 역주로 등장인물의 전후 관계를 해설했다. 알마 출판사의 만듦새는 늘 감탄을 불러온다. 장종완이 그린 표지 삽화는 나무에 갇힌 캘리반이 모델이다. 그 나무가 책 전체를 감싸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몇 가지 아쉬운 고유명사 표기가 눈에 띈다. 극 중 ‘와이스턴’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위스턴 휴 오든이다. 나는 수십 년 동안 내가 잘못 안 줄 알았다. ‘마반위’라는 웨일스 사람도 ‘미반위Myfanwy’가 일반적이다. 브리튼이 페스티벌을 연 고향은 책엔 ‘알브르’라 적었고 국내에선 흔히 ‘올드버러’라 불리나 올버러(Aldeburgh)에 가깝다. <리어왕>에 나오는 착한 백작의 영지 ‘글로우체스터’는 글러스터(Gloucester)이다. 다 그렇다 치고 ‘톨키엔’은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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