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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Nov 17. 2022

아비 바르부르크의 ‘피렌체의 요정’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토르나부오니 예배당 벽화

베른트 뢰크가 2001년에 쓴 『피렌체 1900년』은 독일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가 남긴 일기와 편지, 메모 따위의 유고를 통해 세기말 서양 문명의 황혼을 조망한다. 당연히 국내에는 2005년 번역되어 오래도록 초판을 팔다가 품절되었다. 나는 올해(2022년)의 거의 삼분의 일 가량을 이 책에 할애했다. 그만큼 독해는 깊었고 소득은 많았다.

중고가 5만 원 + 그의 상응하는 원서가

바르부르크는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1866년 함부르크의 부유한 유대 은행가에서 태어난 그는 고고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보티첼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8년 처음 피렌체를 방문한 그는 ‘도상 해석학Iconology’이라는 새로운 연구 방법을 주창했고, 이를 뒷날 후배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발전시킨다. 바르부르크는 1895년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가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원주민의 의식을 관찰한다. 그는 원주민의 의식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유럽의 이교도들과 유사한 점을 발견하고 이를 ‘뱀 의식 강연’이라는 논문들로 정리했다. 

최근 번역된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 구역의 이미지들』과 『잔존하는 이미지』. 참고로 나는 음악 칼럼니스트라 다 봐야 함.

바르부르크는 1897년 동향의 여성 마리 헤르츠와 결혼하자마자 피렌체로 돌아왔고, 이후 그곳 외국인 공동체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로 살았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는 독일 조각가 아돌프 폰 힐레브란트, 독일 작가 이졸데 쿠르츠, 네덜란드 학자 안드레 욜레스와 그의 아내 마틸데 볼프 묀케베르크, 보티첼리 연구에 매진했던 벨기에 학자 자크 메스닐,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였지만 바르부르크가 장사꾼으로 못마땅하게 여겼던 버나드 베렌슨 등이 있었다. 

피렌체의 막대한 유물을 미국으로 실어 나른 베렌슨. 뒤에 보이는 그의 사저 빌라 이 타티Villa I Tatti는 현재 하바드 대학 연구소이다.

19세기 말 피렌체를 찾아온 각국 사람들의 목표는 하나, 곧 ‘아르카디아(낙원)의 발견’이었다. 이들은 당시 신구 대륙의 주요 도시 가운데, 또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가운데에서도 유독 르네상스의 심장 피렌체를 현대 문명을 밝혀줄 희망으로 여겼다. 피렌체로 간 ‘현대의 동방박사들’은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일까? 중세 음유시인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트리스탕과 이쥐Tristan et Iseut』를 현대어로 옮긴 시인 헤르만 쿠르츠의 딸 이졸데 쿠르츠도 그중 하나였다.

우린 확실히 에라토 취향이다. 그녀는 서정시를 관장하는 뮤즈이다
유별나게 성찰적인 이 여성(이졸데 쿠츠)은 역사적인 이탈리아가 저 아르카디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물관과 도서관과 온갖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사유 속에 있는 사실적인 것의 체험으로 이루어진 감정의 모방 작품이, 자기가 복잡한 독일의 현실에서 벗어나 찾아가려고 했던 아르카디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낙원으로 가려는 희망이 그녀를 이탈리아로 이끌어 갔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동경이란 인간 존재의 상수(常數)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아르카디아는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다. 방금 붙잡은 이탈리아는 이들 도이치 사람들에게 통과역에 지나지 않았다. 변증법적인 과정에서 하나의 반명제일 뿐 종합명제가 아니며, 오직 종합명제에 대한 망상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 『피렌체 1900년』 182쪽
내친 김에 들어보자. <아일랜드에서 콘월로: 사랑의 묘약>

바르부르크의 박사학위 논문은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과 <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보티첼리가 중세를 극복하고 르네상스의 창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보티첼리는 벌거벗은 베누스를 통해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세계로부터 이교도의 신을 해방시켰다. 나아가 바르부르크는 보티첼리의 그림이 폴리치아노가 쓴 『마상시합Stanze per la giostra』을 시각화한 것이며, 베누스의 모델이 줄리아노 데 메디치(‘위대한 자’ 로렌초의 동생)가 사랑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일 것으로 추정했다. 

허풍선이 테리 길리엄 감독은 우마 서먼일 것이라 추측했다

바르부르크의 동료였던 허버트 혼은 보티첼리의 명화들이 ‘위대한 자’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육촌인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가 위촉한 것이라 주장했다(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혼의 학설은 1975년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소장 목록이 드러나면서 다시 의문이 제기되었다). 누가 위촉했는가 또는 누구를 그린 것인가가 중요한가? 바르부르크는 오직 역사적인 연구만이 진실로 이끌 것이라고 묵묵하게 도서관을 지킨다. 아니 도서관을 지킨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서재를 도서관으로 개방했다.

아비는 막대한 상속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평생 필요한 만큼 책을 사줄 것을 요구했다. 아비(父)가 당황했을지 모른다. 아멘!

바르부르크와 그의 시대가 남긴 유산을 조합하는 이 책의 정점에 ‘피렌체의 요정’이 등장한다. 1899년 섣달그믐에 바르부르크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 안드레 욜레스André Jolles는 그날 배우 마틸데 틸리 묀케베르크Mathilde Tilli Mönckeberg에게 구혼했다. 바르부르크와 욜레스는 피렌체 외국인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보헤미안 삶의 절정에서 두 사람은 10막의 오페라를 만들었고, 의상을 입은 친구들이 출연했다. 마틸데는 기를란다요의 그림에 나오는 의상을 입었다. 세기말의 피렌체는 거대한 가장 무도회장이었다. 사보나롤라나, 보티첼리의 주인공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100년 뒤 세상...

그들은 먼 것을 동경했다. 이를테면 ‘라파엘 전파’의 그림 속 주연이 되는 것이었다. 욜레스의 약혼녀는 그 가운데 기를란다요의 조연을 택한 것이다. 특히 머리를 그림 속 여인처럼 꾸미는 데 공을 들였다.

요정아 어디 있니? 야속한 태양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미켈란젤로의 스승)의 그림이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제단 뒤에 있는 토르나부오니 예배당의 벽화 가운데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말한다.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벽화 가운데 막 해산한 엘리사벳이 친구들에게 축하받는 장면이다. 르네상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 덕분에 두 친구는 낭만적인 서신 교환을 하게 된다.

저 여기 있어요! 기다린 보람 끝에 이 사진을 얻었다

욜레스는 바르부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를란다요의 벽화에 나오는 소녀를 ‘피렌체의 요정’이라 불렀다. 그녀는 엘리사벳을 축하하러 온 행렬의 맨 끝에 섰다. 산모 아래 두 여인이 막 태어난 세례자 요한을 돌보는 중이다. 중앙의 세 여인 가운데 그림을 위촉한 조반니 토르나부오니의 며느리 조반나 델리 알비치가 맨 앞에서 그림 밖을 응시한다. 나이 든 여인은 막 세상을 떠난 조반니의 누이 루크레치아 토르나부오니이다. 그녀는 피에로 데 메디치의 아내이자 ‘위대한 자’ 로렌초의 어머니이다. ‘피렌체의 요정’이 그 뒤를 따른다. 하늘하늘 하늘색 옷을 입은 그녀는 머리에 과일 바구니를 이었다. 아이와 산모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다소곳한 다른 하객과 달리 요정은 쿵쾅거리듯 뛰어 들어온다. 마치 자신은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순간이 지나면 아기 요한을 보지 못할 것이기라도 한 것인지?

프라토 성당 예배당에 필리포 리피가 그린 <헤롯의 잔치>. 세 살로메가 하늘거린다

욜레스는 요정이 뒷날 요한의 목을 벨 살로메나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벨 유디트와 같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주소를 제대로 찾은 것인지 친애하는 전문가 바르부르크에게 묻는다. 바르부르크는 지친 현실을 떠나 르네상스로 떠난 정신의 여행자 욜레스에게 뭐라고 답했을까? 그는 욜레스에게 보헤미안의 자기만족에 그칠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방식으로는 그림 속 토르나부오니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을 거라고 타이른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

바르부르크는 금욕적인 도메니코 수사들의 예배당에 묵직한 직물의 옷을 입은 하객들 틈에 과일 바구니를 든 요정이 누구일지 차가운 문서고를 들이 팠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그는 현대(당시)에 끼어든 고대라는 모순과 갈등에 주목한다. 경건한 순간에 훼방 놓는 듯 뛰어든 요정 자체가 ‘르네상스’의 상징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녀는 교회와 세속적인 위촉자의 긴장감 사이에 매달린 예술가의 정신을 대변한다. 욜레스는 요정을 괴테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Das ewige Weibliche’쯤으로 여겼다. 

말러의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는 중이다.

뒷날의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여성해방운동 서프러젯의 투사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르부르크는 그토록 손쉽게 현대적으로 개념화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유사 고대를 묘사하는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보다 피렌체의 요정이 훨씬 호소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이사도라 덩컨풍의 브람스 왈츠. 먼지 낼래? 먼지 나게 맞을래?

욜레스 부부는 『중세의 가을』을 쓴 요한 하위징아의 친구였는데, 마틸데는 욜레스와 이혼 뒤 하위징아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욜레스는 나치에 동조한 탓에 종전 뒤 재판받다가 자살했고, 그의 학문적 업적은 잊혔다.

아스라이...

바르부르크의 만년도 밝지 못했다. 그는 조현병을 앓았고 요양원과 연구소를 오가다가 1929년 함부르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은 오늘날 서서히 빛을 얻고 있다. 적어도 나 같은 말단까지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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