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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28. 2022

세 번째 동방박사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행렬>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의 ‘사교와 축제’ 장에서 당대 문화의 정점이 종교나 사교(社交) 행렬, 곧 ‘퍼레이드’였음을 세세히 밝혔다. 이시스 여신을 태운 배를 바다로 내보내던 데서 유래한 배 수레(carrus navalis) 행렬은 카니발이라는 단어에 뿌리가 남아 있다(육식을 금한다는 ‘carne vale’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세속의 축제이던 카니발이 어차피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이기에 배 수레 또한 성속을 가리지 않고 사용되었다. 종교 행렬은 종교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이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기도 했고, 아예 행렬 자체를 위해 기획되기도 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십자가의 개선Triumphus crucis』에서 그리스도가 수레에 앉아 개선하는 모습을 묘사했고, 티치아노는 이와 유사한 목판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더욱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이다.     

티치아노의 목판화
티치아노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와 경쟁하는 김청기 감독의 <똘이장군>

종교적인 개선보다 인기를 끈 것은 세속적인 개선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생애 비교』(흔히 영웅전)에 묘사된 고대인들의 개선은 좋은 본보기였다. ‘위대한 자’ 로렌초는 파울루스 에밀리우스의 개선을 재현했다. 기원전 167년 11월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를 정벌하고 돌아온 로마 장군의 위용을 피렌체에 선보인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을유문화사 판 1권과 3권이다

개선행렬이 지나가는 데 사흘이 걸렸다. 첫날에는 노획한 조각, 그림, 엄청난 초상화를 마차 250대에 싣고 들어왔는데, 하루를 다 써도 시간이 부족했다.

70mm로 봐도 사흘 걸리겠다

둘째 날에는 가장 비싸고 화려한 마케도니아 병기를 실은 마차가 들어왔다. [어쩌고 저쩌고]

마지막 날이 밝자마자 나팔소리가 울렸다. 그 뒤로 살찐 황소 120마리가... 그 다음에는 금화 3탈렌트를 담은 쟁반을 든 병사가 77명... 그 뒤로 파울루스의 지시로 각별하게 만든 성배(聖杯)가 따랐다. [...]

그리고 조금 거리를 두고 왕의 자녀들이 노예처럼 끌려왔으며...

아이들과 시종에 이어 (패주) 페르세우스가 뒤따랐다. [...] 파울루스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전쟁터에서 죽고 사는 것이 자신의 결정이었듯이, 지금도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오.”

[...]

그 뒤로 여러 도시에서 파울루스의 승리를 축하하고자 보낸 왕관 4백 개와 사절을 실은 마차가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장엄하게 치장한 파울루스가 전차를 타고 나타났다. [...]

짜잔

병사들도 모두 손에 월계수 가지를 들고 부대별로 자기 장교들의 뒤를 따르며 노래를 불렀는데, 어떤 사람들은 옛날의 풍습에 따라 농담을 섞어 가면서 여러 가지 노래를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파울루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송가를 불렀다.     

Gloria all' Egitto

전래하는 대로 사흘 동안은 아니었겠지만, 로렌초가 이 행렬을 재현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의 아들 줄리오 데 메디치는 뒷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어 피렌체에 금의환향했을 때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4세기 베이이와 싸워 이기고, 갈리아의 침략을 막아냈던 장군의 개선식은 파울루스만큼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카밀루스 역을 맡은 참가자는 조국의 운명을 돈으로 저울질하지 않겠다는 그의 단호한 선언을 군중에게 다시 외쳤을 것이다.

     

“로마인은 무쇠로써 조국을 지킬 뿐 황금으로써 지키지 않는 것이 전통이다.”     


바사리는 로렌초와 레오 10세가 재현한 로마의 개선식 때 야코포 나르디(Jacopo Nardi, 1476-1563)의 명을 받아 화가 프란체스코 그라나치(Il Granaccio, 1477-1643)가 감독을 맡았다고 적었다. 그라나치는 미켈란젤로와 동문수학한 친구였고 미켈란젤로는 그를 가장 신뢰해 <천지창조>를 의뢰받았을 때 채색을 도와달라고 그에게 가장 먼저 청했다.

그림의 주인공을 빗겨간 한길사. 그래도 꾸준한 게 어디냐!

바사리가 그라나치의 개선식보다 더욱 상세하게 묘사한 것은 1513년 사육제 행렬이었다. 레오 10세가 착좌한 무렵 피렌체에서 두 행렬이 추진되었는데 하나는 ‘다이아몬드 문장’ 모임, 다른 하나는 ‘나뭇잎 문장’ 모임이 주관했다. 교황의 동생 줄리아노가 맡은 다이아몬드 문장은 부친 로렌초를 상징하는 것으로, 세 개의 수레에 소년기의 희망, 장년기의 융성, 노년기의 영광을 묘사했다. 여기에 화가 안드레아 디 코시모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 의상에 피에로 다 빈치(레오나르도의 아버지)가 동원되었다.


교황의 조카 로렌초 2세는 숙부 줄리아노의 행렬보다 더 웅장한 것을 만들도록 나르디에게 요청했다. 나르디는 다이아몬드 행렬에서 부수적인 일을 했던 야코포 다 폰토르모에게 더 큰 책임을 맡겼다. 폰토르모는 수레를 여섯 대로 늘렸다.

      

첫 번째 수레: 사트루누스와 야누스의 황금시대

두 번째 수레: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누마 폼필리우스

세 번째 수레: 카르타고 전쟁이 끝난 뒤 집정관을 맡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네 번째 수레: 클레오파트라와 전쟁에서 승리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섯 번째 수레: 카이사르의 월계관을 쓴 아우구스투스

여섯 번째 수레: 트라야누스 황제


폰토르모가 그린 <이집트의 요셉> - 줄을 서시오!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더라도 이 행렬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는 한 가지 일화로 짐작할 수 있다. 교황이 가져올 새로운 황금시대를 상징하기 위해 한 소년의 벌거벗은 몸에 온통 금박을 입혔는데, 빵집에서 일하던 소년은 용돈벌이 하려다 그만 질식해 죽고 말았다. 오늘날 이런 행사는 그저 폰토르모가 남긴 그림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전하지는 않지만 이런 일련의 행렬에 음악이 없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폰토르모의 <인사>를 가지고 만든 타블로 비방에 아무 음악도 넣지 않은 빌 비올라. 이름이 아깝다

메디치 행렬의 하이라이트는 메디치 가문을 동방박사 행렬의 주인공으로 만든 베노초 고촐리의 벽화이다. 국부 코시모는 가톨릭 교회 내부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열리던 일련의 공의회를 피렌체로 유치했다. 참석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비잔틴 황제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8세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요세푸스 2세였다. 이들을 통해 비잔틴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고대 문물을 접하면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심장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는 고촐리에게 메디치 리카르디의 예배당에 벽화를 그리도록 했다. 당대 복장을 한 인물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러 총출동하는 행렬이 전면을 장식한다.

고촐리의 경탄할 만한 파노라마

동방박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멜키오르는 주교의 모습으로 그렸고, 그 다음인 발타사르는 비잔틴 황제, 그리고 가장 어린 카스파르를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위대한 자’)로 묘사했다.


맨 뒤에 멜키오르
동로마 황제를 모델로 한 발타사르
주인공 카스파르, 속설에 따르면 네 번째 ‘동방박사’도 있었다... 아르타반(마틴 쉰 분)이라고...

르네상스 앙상블 ‘달콤한 추억Doulce Mémoire’은 <바쿠스의 승리Trionfo di Bacco>로 로렌초 당대의 사육제 음악을 묶었다. 하인리히 이자크가 쓴 ‘팔레, 팔레, 팔레Palle, Palle, Palle’는 피렌체 사람들이 메디치 가문을 찬양하는 구호였다. 팔레는 공(Ball)을 뜻하며, 메디치 문장에 그려진 여섯 개의 공을 말한다.

빨레, 빨레, 빨레
빨레 x 6, 잘 봐야 한다

로렌초의 벗 폴리치아노의 시 ‘반가운 오월’Ben venga maggio’에 붙인 작자 미상의 노래는 오늘날도 토스카나 시골에서 불리는 소중한 민요이다. 플랑드르 작곡가들의 복잡하고 두터운 다성음악이 지배하던 이탈리아에서 흔치 않게 살아난 야생화 같은 곡이다.

폴리치아노의 시 전문은 아래에 번역했다

1492년 로렌초가 죽고 아들 피에로가 뒤를 이었지만, 메디치 가문의 통치는 2년밖에 가지 못했다. 프랑스의 침공에 메디치 가문이 쫓겨난 공화정 피렌체는 도메니코 수도회 신부 사보나롤라가 신정을 펼쳤다. 사육제 행렬은 ‘죽음의 무도 행렬’로 바뀌었다.

Carnovale con crocifisso: I. Carro della morte

슬픔과 눈물과 참회는

언제나 우리를 슬프게 하네

죽음의 무리는

울면서 참회하네

우리도 지금의 너희 같았지

너희도 지금의 우리 같으리

우리는 죽었지, 너희가 보듯이

우리도 보리, 죽은 너희를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으리

너희 죄를 회개하기

우리도 사육제에 가곤 했지

우리의 사랑을 노래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죄질은

점점 나빠졌지

이제 우리는 울면서 세상을 떠도네

“회개합니다, 회개합니다!”

눈멀고, 어리석고, 무의미한 자들아

시간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위엄과 영광, 명예와 재산

모든 것이 지나가고 어떤 것도 남지 않네

결국 무덤이

우리를 뉘우치게 하네     

사보나롤라의 화형 장면을 그린 그림과 유품. (본인 아님)

사보나롤라는 메디치를 상징하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값진 그림과 부의 상징이던 양탄자, 사치스러운 옷과 향수 등 탈 수 있는 것은 다 태웠다. 이른바 ‘허영의 소각falò delle vanità’이다. 그러나 메디치의 빈자리는 작지 않았고 신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보나롤라는 1498년 투옥되었다가 화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시편 51편에 붙인 ‘불행한 나Infelix ego’는 고문으로 오른팔밖에 쓰지 못하던 그가 옥중에서 쓴 대표적인 시이다. 조스캥 데프레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Miserere mei, Deus’은 사보나롤라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쓴 대작이다. 조스캥이 섬기던 페라라의 에르콜레 1세 대공은 동향의 신부가 변덕스러운 민심에 희생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피렌체에 탄원을 냈지만, 끝내 그를 구하지 못했다. 만년의 대공은 조스캥에게 곡을 의뢰했으니 바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이다. 오를란도 데 라수스는 ‘불행한 나’에 직접 곡을 붙였다.

맙소사,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린 사보나롤라의 초상을 뒤집었다

불행한 나,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하늘도 땅도 등 돌렸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돌아서나?

누구에게 날아가나? 누가 나를 가엾다 해줄까?

하늘에 감히 눈을 들지 못하네

그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

땅에서 쉴 곳을 찾을 수 없네

그에게 화를 냈기 때문이지

그러면 어찌하지? 절망하나? 그러지 말자!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은 나의 구원자

그러므로 하느님만이 나의 안식처가 되시리

스스로 하신 일을 멸시하지 않으시리

당신 형상으로 만드신 것을 거절하지 않으시리

이제 가장 사랑하시는 당신 하느님께

슬프고 눈물짓는 제가 갑니다

당신만이 희망이고

당신만이 제 안식처이기에

그러나 뭐라 말씀드려야 할까요, 눈을 들지도 못하는데?

슬픔의 말을 쏟아낼게요

당신의 자비를 청하며 말할게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느님

크신 자비로     

사보나롤라가 기거했던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도서관 내부

이렇게 사보나롤라가 태울 수 없던 것이 바로 ‘노래’이다. 심지어 야생화 ‘반가운 오월’의 가락은 사보나롤라가 쓴 ‘여기서 뭘 하나요, 마음이여Che fai qui core’로 가사만 바꿔 불렸다. 사람들이 사육제를 잊었을까?     

‘벤 벵가 마조’와 반드시 비교 감상 요망

여기서 뭘 하나요, 마음이여?

사랑하는 연인에게 가보아요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님

달콤한 불길로 태우시네

모든 슬픈 마음 기쁘게 하시네

그분을 향한 한숨과 갈망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모든 과오를 벗을 거예요

여기서 뭘 하나요, 마음이여?

사랑하는 연인에게 가보아요

예수님과 함께해요, 내 마음이여

그리고 모두 외쳐요

이분이 네가 사랑하는 하느님이다

사랑해야만 하는 분이라고

그분의 사랑을 통해 견디라고

세상의 모든 분노를

여기서 뭘 하나요, 마음이여?

사랑하는 연인에게 가보아요     


당국은 사보나롤라의 남은 추종자들이 그의 재를 모아 ‘성자의 유골’로 삼지 못하도록 아르노강에 뿌렸다. 결국은 흘러갈 수밖에 없다. 행진!

강물은 흘러갑니다, 베키오 다리 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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