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귀 Lion's Ear
불과 37세에 교황이 된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메디치 가문을 통틀어, 그리고 역대 교황 가운데 가장 문화 예술에 밝은 사람이었다. 교조주의자 사보나롤라로부터 타락의 원흉으로 지탄받았던 ‘위대한 자’ 로렌초의 아들이니만큼 그는 학문과 시, 미술, 음악, 사냥 등 사교와 관련된 재능이라면 어느 하나 부족함 없었다. 가문의 정략에 따라 뜻하지 않게, 또 불경하게 교황이 된 그는 사실 가장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양심에 거리낄지언정 어차피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자리였던 만큼 취향이 흠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단, 그런 사치와 향락을 유지하기 위해 이미 만연한 성직 매매는 더욱 판을 쳤고, 급기야 면죄부를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대한 자 로렌초의 유산을 지우려다 벽에 부딪힌 사보나롤라는 레오 10세 이후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레오 10세는 나이가 들어가며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래서 그는 뒤로 갈수록 미술보다는 음악에 더욱 애정을 보인다. ‘메디치 코덱스’라 불리는 악보집은 1518년 조카 로렌초 2세가 오베르뉴의 마들렌 드 라 투르와 결혼할 때 선물로 준 것이다. 『메디치 코덱스』는 레오 10세가 좋아하는 모테트 53곡을 묶은 것이다. 1968년 독일 태생의 미국 음악학자 에드워드 로윈스키는 영인본에서 프랑스 프랑수아 1세의 궁정 음악가였던 장 무통(Jean Mouton, 1459-1522)이 편집자라고 주장했다.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밀라노를 놓고 스위스와 싸워 이긴 끝에 볼로냐에서 교황을 만났다. 이때 프랑스 왕은 교황이 좋아하던 무통을 대동했고, 교황은 피렌체 태생의 대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프랑스로 보내기로 했다. ‘미술 주고 음악 받는’ 문화 교류의 결과 <모나리자>는 프랑스, 『메디치 코덱스』는 이탈리아 것이 되었다. 오늘날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반면, 『메디치 코덱스』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교황이 밑진 거래를 한 것일까?
영인본이 나온 뒤로 『메디치 코덱스』는 아직 전곡 녹음이 없다. 발췌 녹음도 링 앙상블의 <메디치 결혼식>, 조슈아 리프킨이 카펠라 프라텐시스를 지휘한 <레오 만세! 메디치 교황을 위한 음악>, <르네상스 결혼 선물 – 1518년 메디치 코덱스의 음악> 등 몇 종이 있을 뿐이다. 특히 리프킨은 『메디치 코덱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곡가의 대표작을 선별했다. ([번호]는 트랙 순)
조스캥 데프레 Josquin Desprez (ca. 1450-1521)
[8] 숲의 님프 Nymphes des bois (요하네스 오케겜 애가)
[9] (시편 51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Miserere mei, Deus
장 무통 Jean Mouton (before 1459-1522)
[5] 남성 없이 잉태하신 성모님 Nesciens mater virgo virum
[6] 우리를 구원한 나무 Per lignum salvi
[7] 프랑스의 여왕 만세 Exalta regina Gallie
안드레아스 데 실바 Andreas de Silva (ca. 1485-ca. 1525?)
[1] 기뻐하라, 행복한 피렌체여 Gaude felix Florentia
[10] 주님의 모든 아름다움 Omnis pulchritudo Domini
아드리안 빌레르트 Adrian Willaert (ca. 1490-1562)
[2]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동정녀이신 마르가레타 Virgo gloriosa Christi, Margareta
[3] 인사받으소서, 동정녀 성모 마리아님 Saluto te, sancta Virgo Maria
코스탄초 페스타 Costanzo Festa (ca. 1490-1545)
[11] Inviolata, integra et casta es 무해하시고, 온전하시고, 정숙하신 마리아님
Johannes de la Fage (documented 1516)
[4] 주인께서 황량한 도시를 보시니 Videns dominus civitatem desolatam
말할 것 없이 가장 아름다운 조스캥 데프레의 유산으로 시작해, 편집자인 무통과 그의 제자 아드리안 빌레르트, 그리고 포르투갈 태생으로 짐작되는 안드레아스 데 실바, 유일한 이탈리아인 코스탄초 페스타까지 동시대 무반주 다성음악의 보물이 높이도 깊이도 알 수 없는 폭포수처럼 듣는 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기뻐하라, 행복한 피렌체여
자격이 있어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의 진정한 대리인
의심의 여지없는 베드로의 후계자
레오 10세가 의식으로 소환되었다
높은 곳으로부터
보편된 교회를 통치하는
보위에 앉았으니
그 자리는 알려지기를
올바른 믿음에서 벗어난 적이 없도다
그 힘은 사도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에게만 얻은 것이니
모든 이를 심판하되
누구도 그를 심판하지 못하고
누구도 그에게 묻지 못한다
왜 그리 하느냐고
그의 권력에 모든 왕과
공자가 머리를 숙이네
그가 그리스도의 양 떼에 속하지 않으니
그들은 레오를 보고
주인이고 목자임을 모르지 않네
그의 위엄이
모든 왕권을 능가하니
빛이 어둠을 능가함과 같다
그가 조종하는 거대한 배는
전 세계의 어부이신 분의 것이니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소한 문제까지
자신의 관할에 둔 것이다
만세, 가장 거룩하신 아버지, 가장 강하시고
지극히 온화하신 아버지시여
당신은 하느님의 대리자이시며
신앙의 스승이시며
더 큰 빛이시며
권력자 가운데 최상이시며
세상의 주인이시도다
문을 좌우하는 경첩처럼
당신의 선견지명과 권위가
모든 거룩한 믿음의 교회를
지도하노니, 하느님께서 그리 명하시네
그러니 하늘을 향해 부르짖자
선하신 예수님, 레오를 다스리시고, 그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를 보호하소서
여기 임한 그의 식솔이
소리 높여 말하게 하소서
레오 10세 만세
만수무강하기를
그의 복된 통치가 오래 하기를
르네상스 다성음악의 신비한 짜임새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노래 가운데 하나인 조스캥의 <숲의 님프>도 『메디치 코덱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1497년 선배 요하네스 오케겜의 부음을 듣고 쓴 애도가는 이미 당대에 여러 악보집에 실릴 만큼 사랑받았다. 조스캥은 ‘레퀴엠 에테르남’의 정선율 위로 장 몰리네가 쓴 시를 담백하게 직조한다.
테노르 정선율: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오 주님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숲의 님프들이여
샘의 여신들이여
만국의 재능 있는 가수들이여
여러분 목소리를
맑고 과감하게 바꾸시오
날카로운 울부짖음과 애도의 어조로
가장 무시무시한 총독인 죽음이
그대들의 오케겜을 자신의 덫에 가두었으니
음악과 걸작의 진정한 보관자로
학식과 기품이 있되 거만하지 않았으니
대지가 그를 덮는 것은 큰 슬픔이네
상복을 입으라
조스캥, 피어슨, 브뤼멜, 콩페르여
그리고 큰 눈물을 쏟으라
너희 선한 아버지를 잃었으니
안식을 취하소서
아멘
사자는 밑진 거래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