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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27. 2023

황금가지를 들고 네미로!

<황금가지>부터 <지옥의 묵시록>까지

소나무가 즐비한 아피아 가도를 달려보았는가? 고대 로마는 남부로 가는 군사용 도로 ‘아피아 가도 Via Appia’를 닦았다. 1784년, 옛길(Via Appia Antica)과 나란하게 두 호수 방향의 새길(Via Appia Nuova)이 났다. 2년 뒤인 1786년 독일에서 온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로마에서 나폴리로 갈 때 새길을 지났다.

오토리노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가운데 제4곡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마차 시대에나 그랬지, 오늘날 나폴리로 갈 때는 1960년대에 만든 A1 고속도로를 탄다. 새길 옆 호수 이름은 알바노(Lago di Albano)와 레미(Lago di Nemi)이다. 알바노는 교황 별궁(Palazzo Pontificio)이 언덕 위에 자리한 기막힌 풍경의 호수이다. 네미는 디아나 여신을 모신 신전과 칼리굴라 황제의 유람선을 발굴해 전시한 박물관이 있다.

(두 호수 사이 통의 지였던 아리차)

종교 인류학의 역저인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는 이렇게 시작한다. “터너가 그린 <황금가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때 난 당연히 알지 못했다. 차차 터너를 알고, 훨씬 뒤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황금가지>를 보았을 때 감격은 잊을 수 없다.

 “<황금가지>는커녕 터너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정준호

그림의 배경은 네미이다. 호숫가에 디아나 여신이 소풍을 즐기고, 멀리 선남선녀들이 윤무를 춘다. 디아나를 섬기는 사제는 ‘네모렌시스 왕’이라 불렀는데, 기력이 쇠하면 숲에 숨었던 젊은 사제에 의해 목이 잘렸다. 새 왕도 때가 되면 그리되었다.

<황금가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야기. 아폴로 신에게 모래알처럼 많은 생을 청하는 쿠마의 시빌. 쿠마는 나폴리 해안이다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Caligula, 12-41)는 네모렌시스를 자처해 여신에게 권위를 부여받은 통치자라 주장했다. 1920년대에 무솔리니가 호수 밑 배를 인양하라 명했다. 떠오른 배의 흔적과 유물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칼리굴라도 무솔리니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1979년 <대부>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을 발표했다. 월남전 당시 최고의 군인이라 공인받던 커츠 대령이 밀림에 들어가 해괴한 짓을 한다는 소문이 돌자, 군은 사기 저하를 막기 위해 윌러드를 암살자로 보낸다. 윌러드가 본 커츠는 더할 수 없이 존경스러운 풍모였다.

『황금가지』와 『제식으로부터 로망스로』가 놓인 영화 속 커츠의 책상. 두 책 위에는 왼쪽과 같이 성경과 괴테라고 적힌 책이 꽂혀 있다

커츠의 책상 위에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제시 웨스턴의 『제식으로부터 로망스로 From Ritual to Romance, 1920』가 놓여 있고, 그는 다음 사제가 자기 목을 치러 올 것을 안다. 원주민들이 소를 제물로 바치는 축제를 벌일 때, 윌러드는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전임 사제를 난타한다. 야만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 군인에게 명예로운 죽음이었을까?

네미 호수 아래 보이는 배 박물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성배 전설을 탐구한 웨스턴의 『제식으로부터 로망스로』는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 The Waste Land, 1922』의 밑거름이 되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은 주석으로 시를 시작한다.


“이 시의 제목뿐만 아니라 설계와 많은 부수적인 상징은 성배전설에 관한 제시 웨스턴 여사의 저서 『제식으로부터 로망스로』에 시사되었다. (...) 나는 인류학의 또 하나의 저서, 곧 우리 세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던 『황금가지』에 전반적으로 힘입었다.”


이어지는 제명(Epigraph)은 이러하다.


        정말 쿠마에서 나는 한 무녀(Sybill)가 항아리 속에 달려 있는 것을

        똑똑히 내 눈으로 보았다.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라고 물었을 때

        무녀는 대답했다. “난 죽고 싶어.”


        보다 훌륭한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나폴리에서 쿠마의 아폴로 신전을 둘러보는 잉그리드 버그먼, <이탈리아 여행> 가운데

이 모든 것을 만나려고 난 지난여름 아피아 가도를 달려 네미에 도착했다. 석류가 열린 박물관과 숲 속 디아나 신전의 관람자는 나뿐이었다. 나는 완벽하게 터너의 <황금가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로마에 간다면 네미행을 권한다. 괴테와 터너와 무솔리니 그리고 커츠와 디아나 여신과의 만남은 필연이고 운 좋으면 별궁에 온 교황도 우연히 알현할지 모른다!

쿠마에 도착하기 전 트로이의 왕자 에네아스의 행적.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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