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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ug 17. 2023

라 센시티바

레스피기의 셸리 칸타타 (2)

레스피기의 두 번째 셸리 칸타타 <라 센시티바>는 식물 이야기이다. 영어로 ‘The Sensitive Plant’, 한자로 ‘신경초’, ‘함수초’라 부르는 이 식물은 신화 속 인물 ‘미모사Mimosa’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만지면 오그라드는 잎 때문에 ‘Touch me not’이라 불리기도 한다. 미모사는 화려한 꽃도 아니고 암수한몸이라 다른 꽃과 어울릴 필요도 없다. 그 때문에 가장 외로운 꽃이기도 하다.

셸리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심취했던 1820년 무렵 피사에서 『미모사』를 썼다. 3부 315행의 장시이다. 레스피기가 107행을 추려 작곡한 <라 센시티바>는 약 30분 길이이다. 거의 오페라 한 막에 해당하는 길이이니, 시 전체에 곡을 붙였더라면 오페라 한 편이 될 뻔했다. 셸리는 시작부터 황홀경을 펼쳐 보인다.


한 정원에 미모사가 자랐다

싱그러운 바람이 은빛 이슬로 키웠다

그 아이는 부채 같은 잎을 빛에게 열었다가

밤의 입맞춤을 받고 닫았다


레스피기는 셸리가 소개한 미모사의 친구를 꼼꼼히 따라간다. 눈꽃과 제비꽃, 님프와 같은 은방울꽃, 아네모네, 튤립, 가장 아름다운 수선화, 지팡이 같은 백합, 재스민과 월하향이 차례로 나올 때마다 노래는 향기 진동한다. 꽃의 여왕은 장미이던가!


장미는 목욕하러 가는 님프처럼

눈부신 가슴을 깊이 드러낸다

겹겹이 희미한 대기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영혼이 벗겨질 때까지   


셸리 정원의 꽃들은 젊음과 사랑의 신이 보호하는 젊은 연인들처럼 서로 감싸고 뒤섞인다. 이쯤이면 우리는 미모사의 질투와 열등감이 어떨지 알아챌 수 있다.      


미모사는 환한 꽃이 없다

빛과 향기를 갖지 못했다

사랑한다, 사랑의 신처럼, 가슴 깊이 충만하게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한다, 아름다움을!     


셸리의 1부는 이렇게 낙원 같은 정원의 그림을 그린다. 레스피기의 칸타타가 10분가량 그 정경을 유영한다. 2부에서 셸리는 ‘여인A lady’을 등장시킨다. ‘힘’이자 ‘이브’인 그녀는 정원을 정성껏 돌본다.      


그녀는 시내에서 길은 맑은 물을 뿌린다

햇빛에 시들해진 아이들에게,

무거워진 꽃송이에서

천둥이 퍼부은 빗물을 비운다     


1부에서 하루를 간추린 셸리는 2부에서 계절의 변화를 따라간다. 그녀의 은총이 정원에 미치는 영향은 신이 천체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레스피기가 그녀의 등장 부분을 생략해서 지시대명사로만 받기 때문에, 원시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녀’를 미모사로 오해할 수 있다. 물론 성이 없는 미모사는 ‘그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날 갑자기 죽는 이는 미모사가 아니라 여인이다. 여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잎이 갈색으로 변하기 전에 그녀는 낙원을 떠났다! 미모사는 그녀의 장례 송가와 조문객의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    


정원은 한때 아름다웠지만 차갑고 지저분해졌다

한때 정원의 영혼이던 그녀의 시신처럼  

   

여름이 쏜살같이 가을로 흘러갔다     


3부에서 셸리는 여인이 사라진 정원의 황폐함을 신랄하게 그렸다. 마녀의 가마솥이나 채울 재료가 넘쳐나 아름답던 정원을 질식시킨다. 레스피기는 차마 그대로 옮기지 못했다. 다만 꽃들이 져서 산책로 곁의 수로를 막고 썩어가는 것만 노래한다. 미모사는 친구들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애타게 지켜본다. 그러던 그에게도 최후가 왔다.     


미모사는 그래서는 안 되는 양

울었다, 방울방울 눈물은

함께 자란 접히는 그 잎의 눈꺼풀들에서

푸르게 얼어붙은 그림자로 변했다     


겨울이 왔다. 바람은 그의 채찍과도 같다

퓌슬리: 셰익스피어가 『맥베스』에서 언급한 마녀의 몸짓

구부린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그는 맹렬히 옥좌 얹은 전차를 몰았다

북극의 열 배 세기로    


죽은 잡초조차 서리를 피해 달아나고 미모사 뿌리 아래 살던 두더지도 굶어 죽었다. 비가 내리고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이슬이 다시 얼렸다. 북방의 회오리가 죽은 아이의 냄새를 맡는 늑대처럼 정원을 내리쳤다. 레스피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을 때

미모사는 잎사귀 없는 만신창이였다


염세주의와 탐미주의의 극치를 오가는 지점에서 레스피기의 노래는 끝을 맺는다. 셸리는 우화적인 정원에 현실과 이데아를 묘사했다. 미모사는 셸리이고 레스피기이며 누구나이다. 완벽한 존재인 한 여인도 결코 영원히 곁에 있지 않다. 그녀는 한동안 완벽한 이데아를 보여줬지만 그녀 없이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이야기를 대입해 본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내가 만든 이 영상을 들을 자격이 넘친다

크리스티나 여왕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의 정원을 가꿨다. 그러고 보면 아레투사가 살던 곳이 아르카디아이다. 그곳에선 장미가 예찬하고 백합이 향기를 뿜으며 은방울꽃이 연주했다. 이탈리아는 크리스티나가 만든 오페라 정원을 세상에 퍼트렸다. 레스피기라는 미모사가 문득 정원을 바라보았다. 아름답지만 공허했다. 20세기 들어 그 많던 르네상스의 시인은 어디로 갔으며, 바로크 미술과 같은 성과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원은 더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나마 이탈리아에서 죽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의 시를 번역해 곡을 붙인 레스피기는 스스로 정원에 남은 마지막 미모사임을 깨달았다. 그는 차마 셸리의 마지막 구절을 작곡하지 못했다. 미모사가 죽은 자리에 폐허가 된 무덤가에서 온갖 마녀의 잡풀들이 생겨났다. 물론 셸리도 이렇게 비관적으로만 시를 맺지는 않는다. 그는 ‘결론Conclusion’으로 스물네 행의 깨달음을 덧붙였다. 변한 것은 우리 자신이지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감각이 완벽한 것을 받아들이기 부족하기에 그것을 잠시나마 느낄 뿐 영원히 곁에 두지 못한다. 나는 희망으로 들린다. 레스피기의 셸리 칸타타 마지막 곡 <해넘이> 얘기는 돌아와서 마저 하기로 하자.

카페에 앉은 리플리 추종자들이여, 아는가!

이만하면 스페인 광장의 ‘바르카치아 분수’에 음악이 그치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르카치아는 배(船)를 뜻하며, 이 분수는 베르니니 부자(父子)가 교황의 명으로 제작한 것이다. 키츠는 병석에서 이 분수의 물소리를 듣고 친구 세번에게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여기 누워 있다. 그의 이름을 물로 적은 사람이Here lies one whose name was writ in water”

무명 시인으로 남고 싶었을까! 키츠의 묘인 줄 몰랐더라도 이런 문재(文材)의 주인공이라면 누구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것은 <로마의 휴일>(1953)의 시나리오 작가 돌턴 트럼보가 로마에 가지 않고 대본을 썼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눈치오의 소설 『쾌락』을 본 사람이라면 공주가 머물던 바르베리니 궁전이 엘레나의 집이며, 스페인 광장 바로 위 추카리 궁전에 안드레아 스페렐리가 살았고, 그가 셸리와 키츠를 누구보다 숭배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트럼보는 단눈치오 독자임을 뿌듯하게 여겼으리라.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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