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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19. 2021

아레투사가 일어섰다...

레스피기의 셸리 칸타타 (1)

로마에서 탄생한 작품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영화 <로마의 휴일> 아닐까? 로마에 직접 와본 사람보다 영화로 로마를 본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레비 분수나, 진실의 입과 같은 장소는 <로마의 휴일>을 통해 더욱 명소가 되었다. 또 하나의 명장면이 만들어진 곳으로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을 빼놓을 수 없다.

스페인 광장의 젤라토 공주

유럽 어느 나라 공주인 오드리 헵번은 로마 국빈 방문 중 일탈을 꾀한다. 답답한 일상을 피해 심야에 궁을 빠져나온 공주는 길에서 잠이 들고 만다. 로마 특파원으로 일하던 기자 그레고리 펙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우여곡절 끝에 자기 집에 데려온다. 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그녀가 공주인 줄 모르는 남자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침대가 아닌 카우치에서 자라고 한 뒤 파자마를 내준다. 여전히 잠꼬대만 하던 공주가 ‘카우치’라는 말을 듣고 시구를 인용한다.

“아레투사가 아크로세로니안 산에 있는 그녀의 눈 덮인 카우치에서 일어섰다.”

키츠의 시라고 우기는 공주에게 기자는 셸리라고 정정한다. 공주는 키츠라는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아레투사의 시를 쓴 사람은 퍼시 비시 셸리이다.

파우치 아님!

아레투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님프이다. 아르테미스의 시녀였던 그녀는 처녀로 남고 싶어 강의 신 알페이오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샘물로 변해 땅으로 스며든다. 아레투사는 바다를 지나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오르티지아 섬에서 다시 샘으로 솟아났다. 폴란드 작곡가 카롤 시마놉스키가 그곳을 여행하며 영감을 얻어 1915년에 쓴 바이올린 소나타 ‘신화’의 첫 악장이 바로 ‘아레투사의 샘’이다. 섬세한 시정과 몽환적인 반음계로 아레투사 신화를 묘사했다.

여기까지는 예전에 올린 글이다

공주가 기자에게 딴마음 품지 말라는 경고로 읊은 시일까? 그러나 스페인 광장에 선 우리는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아레투사>를 들어야만 한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그는 셸리 시에 붙인 세 개의 칸타타를 썼다. <아레투사>, <라 센시티바>, <해넘이>이다.


20세기에 활동한 레스피기는 스승 주세페 마르투치와 더불어 비발디 이후 200년 만에 오페라에 국한하지 않고 곡을 쓴 이탈리아 작곡가였다(<세미라마>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비롯해 아직 진가가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도 여럿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예술과 풍광을 음악으로 쓰는 데 누구보다 뛰어났다. 레스피기는 1879년 볼로냐에서 태어나 바그너의 어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마르투치에게 배웠다. 1900년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실 극장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그때 관현악의 대가인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로부터 작곡 수업을 받았다. 이듬해 이탈리아로 돌아와 졸업 작품 <전주곡, 코랄과 푸가>를 냈을 때 마르투치는 제자를 “학생이 아니라 스승”이라고 평했다.

푸치니 세대인 마르투치와 스트라빈스키 세대인 레스피기, 그냥 외우삼

아직 관현악단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던 레스피기를 작곡가로 알린 작품은 몬테베르디의 <아리안나의 탄식> 편곡이었다. 아르투어 니키슈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로 소개된 이 곡은 레스피기를 작곡가로 알렸을 뿐만 아니라 거장 몬테베르디를 부활시키는 시발이 되었다. <아리안나의 탄식>부터 레스피기의 마지막 작품인 마르첼로의 칸타타 <디도네> 편곡까지 28년 동안 레스피기는 여성 성악가를 위한 음악에 주력했다. 그것은 오페라와 교향시의 결합으로, 레스피기는 그것을 ‘포에메토 리리코Poemetto lirico’라고 불렀다. 일면 자코모 푸치니의 아리아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를 연상케 하지만 그보다 직접적인 영향은 이곳 스페인 광장으로부터 멀지 않은 메디치 빌라에서 왔다.

메디치 장원의 분수가 쉬고 있다

보르게세 공원 남쪽 언덕에 면한 메디치 빌라는 프랑스가 관리했다. 루이 14세는 코르소 거리에 아카데미를 두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로마 대상Prix de Rome’ 경연에서 우승한 인재를 유학 보내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의 문화를 공부하도록 했다. 재상 콜베르와 조각가 베르니니가 태양왕의 명을 받들었다. 면면히 이어지던 로마 대상 전통은 나폴레옹 시대에 들어 메디치 빌라로 옮겨졌다.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 그리고 음악가가 3년에서 5년의 로마 유학 혜택을 입었다. 그들에게 부과된 의무는 매년 하나씩 작품(그 자체를 ‘발송envoi’이라 불렀다)을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베를리오즈, 생상스, 마스네 그리고 드뷔시와 라벨이 로마 대상을 받고 영원한 도시에 왔다.

메디치 장원의 루이 14세, 분신사바

루이 14세나 못해도 나폴레옹 시기까지는 이탈리아가 유럽 음악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는 독일이 그와 대등한 위치였고, 오히려 종합예술인 오페라는 파리에서 성공해야 대접받던 상황이었다. 1885년 로마에 온 드뷔시에게 도니체티나 베르디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잊힌 작곡가 팔레스트리나와 라소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아무데서나 들을 수 있는 곡이 아니고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곡에 관심을 보였으니 장학금 값을 제대로 한 것이다.


드뷔시가 고국으로 보낸 네 편의 앙부아는 하인리히 하이네 시를 바탕으로 한 교향적 찬가 <쥘레이마>, 관현악 <봄>, 라파엘 전파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시에 붙인 <선택받은 처녀La Damoiselle élue>, 끝으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이었다. 드뷔시보다 여섯 살, 푸치니보다 두 살 많은 마르투치도 이 무렵인 1887년에 메조소프라노를 위한 가곡집 <기억의 노래La canzone dei ricordi>를 작곡했다. 1898년에 마르투치는 피아노 반주를 관현악 편곡했고, 말러나 슈트라우스의 가곡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기억의 노래>는 레스피기의 ‘셸리 칸타타’에 큰 영향을 미친다.

La canzone dei ricordi, Op. 68b: I. "No, svaniti non sono i sogni". Andantino

로마에 유학 온 프랑스 음악가를 향한 관심은 드뷔시에 그칠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자존심 강한 이탈리아 음악계이지만, 경쟁심은 부러움의 시작을 뜻했다. 프랑스에서 미술의 마네와 드가, 음악의 쇼송과 라벨이 연거푸 로마 대상에서 탈락하면서 낡은 예술 행정에 손가락질이 이어지던 시기에 젊은 이탈리아 음악가 레스피기는 드뷔시와 림스키코르사코프에 이어 라벨의 음악까지 관심을 가졌다. 결과적으로 바그너의 반음계와 프랑스의 인상주의, 푸치니의 서정성과 러시아의 색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동경을 결합한 레스피기 음악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영화 <브라이트 스타> 가운데 키츠의 운구. 새벽에라도 이렇게 광장을 비우려면 꽤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한편, 가출 이튿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집을 나선 낯선 나라 공주는 ‘헵번스타일’로 머리를 자르고는 스페인 광장 계단에 앉아 젤라토를 먹는다. 지나가다 마주친 척 그녀 앞에 나타난 기자, 그는 아침 뉴스에서 간밤에 실종된 공주가 바로 자기 집에서 잔 아레투사임을 알고는 특종을 따려고 접근한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계단 바로 옆에 바로 ‘키츠 셸리 기념관Keats–Shelley Memorial House’이 있다. 25세의 키츠가 결핵을 치료하려고 로마에 왔다가 죽은 집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제인 캠피언 감독의 영화 <브라이트 스타>는 벤 위쇼가 키츠를 열연한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다. 젤라토 공주여, 그대가 존경한 키츠의 운구 행렬이 스페인 광장을 지나갔음을 알지 못했단 말인가!

The Funeral of Shelley by Louis Édouard Fournier (1889)

기념관에 키츠와 함께 이름을 건 셸리. 키츠보다 세 살 많은 그도 키츠가 죽은 이듬해에 이탈리아 북부 해안에서 배를 타다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그의 시신도 로마로 옮겨와 키츠가 묻힌 개신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레스피기는 로베르토 아스콜리가 이탈리아 말로 번역한 셸리의 시를 세 편 작곡했고, 첫 작품인 <아레투사>는 “이전에 쓴 어떤 작품보다 자신을 대변한다”라고 자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양이 아레투사를 끌어안는 부분은 뒤에 그 유명한 <로마의 분수> 가운데 ‘트레비 분수’ 악장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리스의 놀라운 현인들은 꽃송이라도 띄워 실험했을지 모른다. 오늘날의 알바니아 아크로세로니아(그리스 말로 벼락이 내린 산이다)에 있던 눈이 시냇물로 녹아내려 용케 알페이오스 강과 섞이지 않고 해양 심층수가 되어 저 멀리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 샘물이 되었음을 말이다(실제 꽃잎이 아니라 나무잔으로 했다는 전설이 있다). 어쨌거나 12분 남짓한 길이의 노래는 때로는 분수 같고 때로는 대양과 같은 관현악의 물줄기에 관능적인 꽃송이의 음성을 다치지 않고 고이 실어간다.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아레투사 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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