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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22. 2021

그 자체로 오페라인 로마

베냐미노 질리(백합) 광장에서

흔히 1597년 피렌체의 카메라타에서 탄생한 자코포 페리의 <다프네>를 첫 오페라로 본다. 다만 <다프네>는 전하지 않기에 1607년에 만토바에서 몬테베르디가 쓴 <오르페오>를 효시로 꼽는다. 바로크 절정기 오페라의 중심지는 나폴리와 베네치아였고, 그 뒤로 밀라노의 라 스칼라가 이탈리아 오페라를 대표했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전역이 오페라의 중심지라 자부한다. 로마도 1600년 카발리에리가 <영혼과 육체의 묘사>를 작곡했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최고의 오페라 제작자였다. 그러나 로마의 오페라는 수도에 걸맞은 수준은 아니다. 왜 그랬을까?

레 자르 플로리상의 <오르페오> 전곡 공연. 이런 것을 횡재라 한다. 그런데 이젠 횡재가 너무 많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르네상스 이래 음악은 교회의 애물단지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배에 음악을 동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교리보다 음악에 더 빠져들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음악이 결코 위상이 같을 수 없는 종교 자체와 경쟁했다. 교회로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다성음악의 허용 여부를 놓고 논쟁하다가 팔레스트리나의 손을 들어줬고, 비슷한 시기에 필리포 네리는 종교적인 음악극, 곧 오라토리오를 창시했다. 일단 물꼬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다.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어 로마에 온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음악 문화를 주도했다. 교황이 연거푸 그녀의 행보에 제동을 걸지 않았더라면, 로마는 나폴리나 베네치아에게 결코 오페라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신 로마는 칸타타, 세레나타, 오라토리오와 같은 무대가 필요치 않은 서사 음악에 주력했다. 오페라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Cecilia Bartoli, Sacrificium - Riccardo Broschi: Son Qual Nave

바로크가 만개해 이미 새로운 기운이 피어날 때인 1730년 무렵에는 로마에 여러 극장이 경쟁했다. 기존에 운영되던 카프라니카, 알리베르트, 파체 이렇게 세 개의 극장에 1726년 테아트로 발레와 1732년 테아트로 아르젠티나가 개관한 데에 이어 토르디노나가 닫았던 문을 다시 열었다. 교황은 오페라를 연중 사육제 기간에만, 그것도 단 두 개 극장에만 허용했다. 1740년에 칙령은 세 개의 극장이 제비를 뽑아 둘을 가리고 나머지 하나는 보상받도록 명했다. 규제는 끝도 없었다. 18세기 내내 여성은 대중 극장 무대에 설 수 없었고, 그 역할은 거세한 남성 가수 ‘카스트라토’가 대신했다. 이밖에도 지진이나 전쟁, 또는 종교적인 경사로 인해 아예 공연을 금한 때도 여러 번 있었지만, 명맥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극장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깊이 파고들었는지 보여준다.

로마 테아트로 발레가 초연한 로시니의 <라 체네렌톨라>

편법도 많았다. 교황이 금한 곳은 어디까지나 대중 극장이었기 때문에 추기경이나 유력 가문의 궁전에서는 여전히 때나 출연자의 성을 가리지 않고 각종 음악극을 공연했다. 로마에 온 각국 사절의 결혼, 출산, 장례를 기념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세속적인 공연이나 종교적인 예배나 작곡가와 연주자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디에서 공연하느냐, 그리고 어떤 가사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오페라가 되었다가 미사가 되었다가 제목만 바뀌었을 뿐 사람들이 듣는 음악은 사실상 같았다. 카라바조가 그리면 창녀도 성녀가 되고 성자도 필부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르젠티나 극장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폼페이우스 극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기원전 55년에 완공된 폼페이우스 극장은 전과 같은 가설무대가 아니라 로마 최초의 영구적 석조 극장이었다. 이때도 극장이 서는 것은 마찬가지로 쉽지 않았다. 로마의 정신을 요약하는 견실절검(堅實節儉) 정신에 가장 반대되는 흥청망청한 곳이 극장이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폼페이우스 극장은 지름이 150미터, 수용인원이 17,500명인 대형 시설이었다. 주변국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며 얻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대중에게 여가 생활을 가져다주었다. 

폼페이우스 극장의 조감도

기원전 44년 바로 그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독재자를 살해했다는 암살의 명분은 도리어 영웅을 필요로 하는 군중의 분노를 가져왔고, 로마는 내전 끝에 공화정을 마감하고 제국 시대로 접어든다. 공화정과 제정의 대립은 우리의 주제이기도 하다. 5세기 로마제국이 멸망하며 폐허로 남은 폼페이우스 극장 자리는 오늘날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Largo di Torre Argentina’라고 불리는 유적지이다. 아르젠티나는 오늘날 스트라스부르의 옛 이름에서 왔다. 그 도시 출신인 교황의 의전 담당관 요하네스 부르카르트가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땄다. 토레는 그곳에 탑이 있었음을 말한다. 

오늘날 로마 길고양이의 성지가 된 라르고 디 토레 아르젠티나 

1732년 1월 31일 사육제 기간에 아르젠티나 극장이 문을 열었다. 1816년 조아키노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이 극장의 가장 큰 자랑이다. 베르디는 1844년 <두 사람의 포스카리>와 1849년 <레냐노의 전투>를 초연했지만, 당대 전 유럽의 음악 수준으로나 베르디의 전작에 비춰보아 우리 관심사가 될 정도는 아니다. 두 작품 모두 로마가 배경도 아니며(각각 베네치아와 밀라노가 배경이다), 이 음악들로 로마가 달라진 것도 없다.

토르디노나가 아폴로로 바뀐 뒤 철거되고 선 비석. 왼쪽 뒤로 산탄젤로가 살짝 보인다.

크리스티나 여왕의 토르디노나 극장은 테베레강이 범람할 때마다 침수되기 일쑤였다. 이름을 아폴로 극장으로 바꾼 19세기, 홍수 중에도 중요한 초연 기록을 남겼으니 1853년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이다. 베르디는 <일 트로바토레> 직전과 직후 동시에 작곡한 <리골레토>와 <라 트라비아타>를 모두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공연했지만, 로마도 한 작품을 배려받았다. 

지난여름 다니엘레 가티가 지휘하는 로마 오페라가 치르코 막시모(막시무스 전차 경주장)에서 공연한 <일 트로바토레> 전막

중세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일 트로바토레>는 형제 살해에 이르는 가문의 비극이라 로마와 딱히 연관은 없다. 그러나 다음 작품 <가면무도회>는 베르디의 작품 가운데 로마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경우이다. 원래 베르디는 스웨덴 구스타프 3세의 암살을 배경으로 한 이 오페라를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을 위해 준비했다. 그러나 당시 ‘양 시칠리아 왕국Regno delle Due Sicilie’의 수도였던 나폴리에서 국왕이 암살되는 작품이 검열의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극장과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치 끝에 결국 다음 시즌 <시몬 보카네그라>를 공연하는 조건으로 <가면무도회>는 풀려났다. 

파파노가 로마에서 <가면 무도회>를 녹음한다면 뜻깊을 일이다.

역시 정치적 검열이라면 나폴리 못지않게 고초를 치른 베네치아나 밀라노보다 <일 트로바토레>가 성공을 거둔 교황령 로마가 <가면무도회> 초연의 후보지로 급부상했다. 물론 여기서도 베르디의 뜻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고, 스웨덴 구스타프 3세는 식민지 미국의 보스턴 총독 리카르도로 바뀌었다. 베르디가 나폴리에서 미리 힘을 빼지 않았더라면 <가면무도회>는 빛을 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양보한 덕에 로마는 한 작품을 더 챙겼다. 만일 스웨덴에서 온 크리스티나 여왕이 <가면무도회>를 마주했다면 뭐라고 했을까?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했을지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했을지 궁금하다.


나는 바로크 이후 이탈리아의 음악적인 기여가 그 이전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바로크 시대까지 독보적인 음악을 내놓은 이탈리아였지만, 그 뒤로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을 차례로 배출한 독일이 음악사의 새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앞선 극장 시스템은 무시하지 못할 진전을 가져왔다. 그것은 먼저 하드웨어에서 왔다.

비첸차의 올림피코 극장. 사비오네타의 고대 극장과 파르마 파르네세 극장과 함께 현존하는 세 르네상스 극장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는 계단식 객석과 전면 무대를 갖춘 근대 실내 극장을 보편적으로 만들었다. 무대 뒤의 발전은 더 놀라웠다. 각종 기계장치를 이용한 장면 전환은 환상적이었다. 관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공간을 뛰어넘는 경험을 했다. 대개 이런 종류의 초월은 만일 그 시대 이전 사람이 보았다면 이해 못 할 수준이지만, 일단 맛을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관객은 오페라를 가장 선망하는 구경거리로 생각했고, 예술가라면 음악가가 아니라도 오페라에 종사하는 것이 성공을 보장받는 지름길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운영할 돈이었다. 신대륙의 경영으로 막대한 돈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탈리아는 유럽 상류 자제들의 수학여행으로 그 양분을 받아먹었다. 성지 순례지로 로마의 위상도 예전만은 못했지만, 무시 못 할 것이었다.

18세기 무대를 재현하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팀

도니체티의 <람메르모르의 루치아>에서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까지 숱한 걸작의 대본을 쓴 살바토레 캄마라노의 집안을 보면 극장 예술이 예술계 전반에 미친 영향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살바토레의 할아버지는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의 배우였다. 그의 아들이자 살바토레의 아버지 주세페 캄마라노는 화가였으며, 산 카를로 극장의 천장화와 무대 배경을 남겼다. 살바토레의 아들 미켈레 캄마라노도 화가였다. 미켈레가 그린 전쟁기록화가 베르디의 작품과 더불어 이탈리아 독립과 통일의 등불이 되었다.

산 카를로 극장의 천장화. 아폴로가 시인들을 미네르바에게 안내한다

이탈리아 오페라 시스템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을 이뤘다. 작품의 선정과 작곡 방식에 대해 작곡가가 전권을 가졌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시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어떤 대본에 곡을 붙이는지가 오페라의 위상을 예고했고, 일단 성공한 대본이면 작곡가들이 앞다퉈 찾았다.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가 로마에서 쓴 대본 『버림받은 디도Didone abbandonata』에는 도메니코 사로(1724), 니콜로 포르포라(1725), 레오나르도 빈치(1726), 발다사레 갈루피(1740), 요한 아돌프 하세(1742), 니콜로 욤멜리(1747), 톰마소 트라에타(1757), 니콜로 피친니(1770)가 곡을 붙였다. 메타스타시오의 또 다른 성공작 『아르타세르세Artaserse』도 1730년 빈치가 작곡한 뒤로, 하세(1730), 글루크(1741), 피에트로 키아리니(1741), 카를 하인리히 그라운(1743), 발다사레 갈루피(1749),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60), 요제프 미슬리베체크(1774)가 따랐다. 요즘으로 말하면 ‘리메이크’인 셈이다.

빈치의 <버림받은 디도>의 첫 녹음

베르디 시대에 들어 이런 관행은 점차 바뀌었다. 이때까지 극장은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작곡가에게 강요했다. 베르디의 높아진 명성은 갑을 관계를 바꿨다. 베르디의 대리인인 리코르디 출판사가 극장 경영진과 직접 계약을 끌어낸다. 초연 배역의 확보가 가장 먼저였다. 일급 가수라면 위대한 베르디의 작품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일단 가수가 정해지면 그에 맞는 오페라 주제를 선택했고, 이때 작곡가의 예술적인 자유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베르디는 프리드리히 실러나 빅토르 위고와 같은 위대한 극작가의 작품을 가장 선호했고, 검열 탓에 각색이 불가피했지만, 그가 원하는 수준에 최대한 근접할 때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대본작가는 베르디와 협의해야 했고, 작곡가는 장면뿐만 아니라 가사의 길이와 운율도 바꾸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 ‘말이 먼저냐 음악이 먼저냐’ 할 것 없이 창작은 동시에 이뤄졌고, 이때 말(음악 이외의 모든 것)을 끌고 가는 것은 언제나 음악이었다. 악보는 성악가가 참여한 연습에서 최종 완성되었다. 베르디의 계약서는 종종 그가 세 차례의 공연을 ‘지휘’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가 악단과 성악가를 이끈다기보다는 지휘자 가까이에서 공연을 참관하며 성공적인 부분의 박수를 받겠다는 의미였다. 오늘날 아리아마다 성악가에게 쏟아지는 박수를 생전의 베르디는 자신이 직접 챙기곤 했다. 마지막 커튼콜에서 그가 제작진 한가운데에 섰음은 물론이다.

의사장에서 <운명의 힘>을 작곡하는 로널드 픽업(1940-2021)과 베르디 아내 역의 카를라 프라치(1936-2021). R.I.P.

베르디가 애써 세운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는 푸치니였다. 어려서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오페라 작곡가의 꿈을 꾼 그는 토리노에서 초연한 <마농 레스코>(1893)와 <라보엠>(1896)의 잇단 성공 뒤 마침내 1900년 1월 14일 로마에서 <토스카>를 무대에 올렸다. 1880년에 개관한 코스탄치Costanzi 극장은 오늘날 ‘로마 오페라 극장Teatro dell’Opera di Roma’이라 불린다. 그보다 10년 전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처음 올린 곳이니 로마를 대표할 만했다.

도밍고 지휘, 파바로티 노래, 체피렐리 연출의 로마 오페라 <토스카>

앞서 본 3막의 무대 산탄젤로뿐만 아니라 1막이 벌어지는 산 안드레아 델라 발레 성당과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2막의 파르네세 궁전까지 온통 로마 시내를 배경으로 한 <토스카>야말로 이 도시가 자랑할 최고의 오페라이다. 푸치니 전작으로 보아도 그렇고 당대 유럽의 수준에 비추어도 부족하지 않다. 차이콥스키, 브람스, 브루크너가 가고, 지휘자로 확고한 말러는 괴상한 교향곡으로는 아직 인정을 못 받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아직 오페라를 쓰기 이전이었다. 클로드 드뷔시나 에드워드 엘가의 명성도 나라 밖을 넘기 전이었다. 푸치니는 오페라의 나라, 음악의 나라 이탈리아 최후의 거장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인 1927년 말 없던 영화는 ‘소리’를 얻었다.

이렇게 인류는 차원 이동의 첫 단계를 이룩했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오페라를 통해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한 극장을 현대화했고, 음악가를 종합예술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의 오페라 ‘영화’에서 음악가가 감독이나 주연배우에 앞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니노 로타, 버너드 허먼, 엔니오 모리코네, 존 윌리엄스, 한스 치머 정도가 감독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한 협력자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렇더라도 <로마의 휴일>을 감독 윌리엄 와일러나 음악가 조르주 오릭(프랑스 ‘6인조’의 멤버이다)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명이나 다름없던 오드리 헵번이 신데렐라가 될 무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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