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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14. 2021

데카르트의 마지막 제자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과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이어진 ‘30년 전쟁’은 근대 유럽 체계를 완성했다. 스페인을 대신해 프랑스가 최강국이 되었고, 그와 겨뤘던 신성로마제국, 곧 오늘날의 독일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톨릭인 프랑스는 독일을 잡기 위해 신교의 맹주 스웨덴과 손잡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에는 영웅이 따르게 마련이니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원수(元帥)가 구교를 대표했다면 신교 측에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 2세가 있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아돌프 왕이 1632년 뤼첸 전투 대승의 보람도 없이 37세의 이른 나이에 전사하고 2년 뒤 발렌슈타인도 측근에게 암살되면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세기 스웨덴 화가 카를 발봄이 그린 <뤼첸 전투 뒤 발견된 구스타프 아돌프 국왕의 시신>

스웨덴에서는 국왕의 딸 크리스티나가 여섯 살의 나이에 즉위하고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가 섭정했다. 전쟁이 지지부진하던 무렵 소녀 왕 크리스티나는 문예 부흥과 계몽 철학에 열을 올렸다. 바이킹의 나라 스웨덴에 프랑스 궁중 예절을 소개했고,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세르반테스에 열광했다. 

머리를 따는 로리의 할아버지 로렌스 씨에게 몰리에르를 들려주는 그레타 가르보

누구보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여왕의 등불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직접 데카르트에게 편지했고, 그를 스톡홀름에 초대해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 1649』 강의를 들었다. 겨울에 스웨덴에 도착한 데카르트는 오래지 않아 객지에서 사망한다. 추위에 따른 폐렴이라는 오랜 사인은 2010년 비소 독살이라는 추가 연구로 대체되었다. 여왕의 가톨릭 개종에 급진적인 데카르트가 방해되리라는 추측에 프랑스 측이 손을 썼다는 것이다.

별로 불경하지도 않은데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거룩한 동종 주술에 비소를 처방하다니!

성년이 되어 섭정을 물린 크리스티나 여왕은 30년 전쟁을 마감했고, 친정을 통해 스웨덴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공부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어 처녀 왕은 건강을 해치기까지 했다. 1654년 27세의 여왕은 돌연 양위 뜻을 밝혔고 의회의 만류에도 뜻을 관철해 고종사촌 카를 구스타프가 뒤를 이었다. 


1933년 그레타 가르보가 주연한 영화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페인 공사 안토니오 피멘텔을 여왕의 은밀한 연인으로 그렸고, 2015년 영화 <처녀 왕The Girl King>에서는 에바 스파레라는 시녀를 여왕의 동성애 상대로 지목했다. 여왕의 동성애 성향은 당시 여성이었다면 갖지 않았을 성 역할에 고민했음을 떠올리면 이해가 간다.

네덜란드에서 여왕의 연애에 관한 편지를 받은 데카르트, 해골은 죽음을 뜻하는 바!

아쉽게도 두 영화 모두 크리스티나 여왕의 스웨덴 시절만 그렸지만, 사실 그 뒷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다. 여왕은 홀연히 양위한 뒤 벨기에로 건너가 그곳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30년을 싸우다 독일을 쑥대밭으로 만든 이유가 무색해지는 개종이었다. 여왕이 인스브루크를 지나 페라라, 볼로냐, 리미니, 페사로를 거쳐 로마의 플라미니아 문을 통과한 날은 1655년 12월 20일이었다. 그녀도 다른 순례자들처럼 카라바조의 베드로와 바울로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이튿날에는 베르니니를 초대해 환담했고 크리스마스에는 교황 알렉산드로 7세에게 성체 성사를 받았다. 교황은 여왕에게 자신의 이름을 내려 ‘알렉산드라’라 부르게 했고, 이후 사육제까지 내내 불꽃놀이와 각종 연희, 오페라 무대가 줄을 이었다. 신교도 맹주의 여왕이 가톨릭의 품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대우였다. 로마는 교황이 갖지 못한 그래서 필수적인 여성성의 상징을 바라마지 않았을 것이다.

여왕을 환대하는 바르베리니 궁전의 잔치

1656년 1월 24일 여왕 자신이 파르네세 궁전에서 아카데미, 곧 예술의 향연을 열었으니 뒷날 ‘아르카디아 아카데미’라고 불릴 향연의 시작이다. 여왕의 아카데미는 고전적인 이상을 추구하려는 목적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예술가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여왕 자신의 예술적인 야심을 투사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녀는 직접 쓴 대본을 예술가들이 매만지게 했으니 대표적인 것이 세바스티아노 발디니가 가사를 쓰고 스트라델라가 곡을 붙인 세레나타 <별들의 힘La forza delle stelle>이다. 크리스티나는 왕실 발레의 주인공이 되려고 했던 루이 14세에게 배운 대로 실천했다. 로마의 명사가 된 크리스티나 여왕은 이어 프랑스를 방문하는데, 이때 이탈리아에서 알게 된 측근 모날데스키 후작의 첩자 행각이 드러나 그를 처형한다. 

여왕이 여생을 보낸 코르시니 궁전

1658년 그녀가 로마로 돌아왔을 때 전과 같은 환대는 없었고 도리어 이탈리아의 아들을 죽인 바이킹 여왕이라는 싸늘한 시선만 돌아왔다. 특히 교황은 180도 달라진 표정을 보였고, 이에 여왕은 퀴리날레 궁전 근처의 거처를 테베레강 건너 자니콜로 언덕 아래 리아리오 궁전(현 코르시니 궁전)으로 옮겼다. 이곳이 그로부터 30년 동안 로마 문화의 중심이 될 것이었다. 어쩌면 그토록 오래 로마에 기거할지 여왕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1660년 사촌 왕이 죽자 다시 스웨덴 왕위를 되찾고자 했지만, 가톨릭 신자가 된 그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668년에는 스웨덴이 지분을 가졌던 가톨릭 국가 폴란드의 왕위를 노렸지만, 이 또한 불발되었다. 1667년 알렉산드로 7세에 이은 교황 클레멘스 9세는 이전부터 그녀와 취향을 공유하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함께 연극과 음악을 즐겼지만, 교황은 불과 2년 재임 뒤 선종했다. 

교황 클레멘스 9세가 추기경 시절 가사를 쓰고 마르코 마라촐리가 곡을 붙인 <인간의 삶> 가운데

크리스티나 여왕은 예전에 감옥으로 쓰던 토르 디 노나 자리에 극장을 세웠다. 로마의 첫 대중 극장 토르디노나는 1671년 프란체스코 카발리의 <시피오네 아프리카노>로 문을 열었다. 교황의 영향력 아래 있던 로마가 오페라에 늘 친화적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먼 뒷날 베르디는 이름을 아폴로 극장으로 바꾼 이곳에서 <일 트로바토레>와 <가면무도회>를 초연했으니 여왕이 뜬 첫 삽 덕분이다. 그러나 새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크리스티나의 극장이 대중을 타락하게 한다고 생각했고, 후임 인노첸시오 11세는 극장을 곡물 창고로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이나 앞이 깊이 파인 옷을 입는 것을 금지했다.

마라 갈리시가 하프 편곡한 파스퀴니의 토카타. 여왕의 초상과 연주자의 사진 합성

즉위 전에 자신의 로열석에 앉아 오페라를 즐기던 교황의 돌변한 태도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 여왕은 직접 관여한 무대에 계속해서 여성 음악가를 세웠다. 여왕이 로마에 온 이래 카리시미는 변함없는 그녀의 음악감독이었고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와 베르나르도 파스퀴니도 아카데미의 주요 인사였다. 아르칸젤로 코렐리는 첫 작품인 <교회 소나타집>을 여왕에게 헌정했다. 코렐리는 1687년 영국의 제임스 2세 즉위를 축하할 때 150명의 악사를 지휘해 파스퀴니의 곡을 연주했다. 1680년 18세의 청년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는 1684년 나폴리로 가기까지 리아리오 궁전에 머물며 여왕의 합창대를 이끌었다. 뒷날 로마로 돌아온 스카를라티는 여왕이 카를로 제수알도의 마드리갈을 무엇보다 좋아했다고 기억했다. 1689년 ‘북구의 아테네’는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여성으로는 드물게 성 베드로 사원에 안장되었다.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작품번호 1번 중 열두 번째 소나타

여왕이 아낀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는 1643년 로마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시골 네피에서 태어났다(2018년 새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1639년생으로 알려져 왔다). 일찍 남편이 죽자 스트라델라의 모친은 두 아들을 데리고 로마에 와 귀족의 시종으로 생계를 꾸렸다. 볼로냐에서 음악을 배운 스트라델라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고 스물네 살부터 작곡에 전념했다. 스트라델라는 170곡이 넘는 칸타타와 각각 여섯 개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그밖에도 많은 기악곡을 지었고, 뒷날 헨델은 그의 선구적인 음악을 인용했다. 그러나 방종했던 스트라델라는 교회 돈을 횡령하는가 하면, 베네치아에서 도제의 정부에게 음악을 가르치던 중 그녀와 사랑에 빠져 토리노로 도피했다. 결국, 1682년 제노바에서 자객에게 살해되었을 때 나이가 38세였다. 

스트라델라의 허무맹랑한 삶을 오페라로 쓴 뜬금없는 세자르 프랑크

일단 스트라델라 이전 또는 이후의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 그의 음악을 들으면 깜짝 놀라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서야 실체가 드러난 음악은, 이전과 비교할 때 완전히 현대적이기에 이후 스카를라티나 헨델의 성과가 어디에서 왔는지 좀 더 확실해진다. 뚜렷한 선율과 매끄러운 조바꿈은 바로크 회화의 조명과 더욱 잘 대비된다.


다시 여왕이 스트라델라와 <별들의 힘>을 작곡했던 1675년 무렵으로 돌아가자. 그녀가 『영혼의 열정』의 저자 데카르트에게 이성의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하면 사랑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지 물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해답은 <별들의 힘>에서 찾을 수 있다.

<별들의 힘 또는 일 다모네>의 신포니아

스트라델라의 서곡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조차 의심 없이 17세기의 달빛 비치는 테라스 앞에 선 것으로 믿게 한다. 그곳에 연인 다모네와 클로리가 서 있다. 한두 절만 떼어 보아도 두 사람이 어떤 지경인지 알 수 있다. 

다모네: 내 심장은 그대를 향해 녹아내립니다. 내 가슴에 하나 이상의 심장이 있다면, 가령 천 개라면 그대의 사랑스러운 눈길 앞에서 나는 천 가지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클로리: 저는 별자리 운명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당신의 마음만이 제 바라는 모든 것이니까요.
두개골 해부

두 역할 모두 소프라노가 맡는다는 점은 영화 <처녀 왕>의 동성애 시각에 힘을 보탠다. 발레 뒤로 두 연인 앞에 다섯 행인이 등장한다. 먼저 콘트랄토, 테너와 베이스가 사랑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인다.     

큐피드에게서 도망치는 자는 누구든지 마음의 평화를 / 찾지 못할 것입니다 / 얻을 것입니다. 
영혼, 다른 나라의 유혹에 눈멀지 않는 마음은 기쁨으로 / 고통과 한숨으로 / 순교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성은 그러한 쓴맛 / 단맛을 상상할 수 없으며, 아름다움은 이성을 위한 순수한 독 / 꿀입니다.   
14. Terzetto "Chi segue - chi fugge Cupido"

소프라노 두 사람까지 가세해 신화 속 슬픈 사랑의 주인공인 레안데르, 악테온, 이피스, 다프네를 소환한다. 보기에 따라 사랑은 아름답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 다시 신포니아가 장면을 바꾸면 다모네와 클로리가 변치 않을 사랑을 노래한다. 두 사람 눈과 귀에 남의 이야기 따위가 들릴 리 없다. 다섯 행인이 마드리갈을 부르는 것으로 사랑론은 끝을 맺는다.     

30. Madrigale "Stelle, voi ch’influite"
내 안에 거친 열정을 일으키는 별들이여, 그대들이 쏜 큐피드의 화살 하나하나가 내 상처에 소금을 뿌립니다. 꺼지지 않고 타올라 내 마음의 갈망을 부채질하니 내가 굴복하면 영광은 그대 것이고, 행운은 나의 것이리.
속임수 아닐까요?

50분 남짓한 이 사랑의 세레나타는 사실상 앞으로 전 유럽의 극장에서 벌어질 일을 예고한다.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운 오페라는 단 하나도 없으리라는 점을 사랑으로부터 독립한 처녀 왕이 선포한 것이다. 그것도 역시 독신인 교황의 본산 로마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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