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과 『무고한 존재』의 주인공은 작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원하는 모든 여성과 연인이 되었고, 떠날 때는 미련 없었다. 단눈치오가 얼마나 음악에 자신 있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자 자타가 공인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천재 단눈치오의 대본으로 만회하고자 했다. 단눈치오는 바이런 원작의 『파리시나』를 제안했다. 그러나 가격이 너무 비쌌고 푸치니는 더 간결한 대본을 원했다. 단눈치오 전기 작가 루스 휴스핼릿의 비유가 정답이다. “그것은 바다가 덜 젖길 바라는 것과 같았다.”
마스카니의 <파리시나>. 같은 원작의 도니체티 곡도 있다만...
결국 『파리시나』는 단눈치오의 동갑내기로 천재성의 퇴보 상태였던 피에트로 마스카니(푸치니는 이들보다 여섯 살 어렸다)에게 돌아가면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대신 단눈치오는 단테 원작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리카르도 찬도나이에게 주어 후배 작곡가의 최대 걸작으로 만들었다. 푸치니가 이때 쓴 <서부의 아가씨>와 <제비>는 그의 전작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단눈치오의 극을 위해서라면 꽃시장 하나는 사야 한다
괴테와 베토벤의 선례에서 보듯이 당대 최고 작가와 음악가의 협력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서로 시차를 둘 때, 그러니까 거장과 신인의 만남일 때 또는 한쪽의 사후 창작일 때 성공 확률이 높다. 그러나 성공했다고 꼭 빛을 보는 것도 아니다. 단눈치오와 토스티의 만남이 그러하다. 너무 멀리 가서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지만 그것은 숙명이다.
이분은 거의 <34번가의 기적>에 나오셨던 거 같은데... 크리스 크링글스라고.. 북극에서 오신..
프란체스코 파올로 토스티(Francesco Paolo Tosti, 1846-1916)는 단눈치오의 동향 선배이다. 아브루초는 험준한 산과 아드리아해를 면한 지역으로 단눈치오와 토스티는 각각 페스카라와 오르토나 이렇게 모두 해변에서 태어났다. 그뿐 아니라 ‘프란체스코 파올로’는 단눈치오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데 페스카라와 오르토나 사이의 해변 마을 프랑카빌라에 또 한 사람의 프란체스코 파올로가 살았으니, 화가 미케티(Francesco Paolo Michetti, 1851-1929)였다.
이것이 대상작! <요리오의 딸>
1895년 제1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탈 미케티는 1880년 무렵 프랑카빌라에 수녀원 건물을 매입해 그곳에서 예술가 동호회를 열었다. ‘만찬회 Cenacolo’(소크라테스의 ‘향연’이나 그리스도의 ‘만찬’을 본뜬 것이다)라는 이름의 서클에서 아직 십 대의 단눈치오는 삼촌이나 아버지뻘인 미케티, 토스티와 어울릴 정도로 조숙했고, 그들로부터 다른 예술의 양분을 흠뻑 마실 수 있었다.
토스티 / 단눈치오 / 미케티 합작음반!
이탈리아의 마르게리타 왕비의 음악 교사로 명성을 얻은 토스티는 이미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궁정에서 활동 중이었다. 이때 토스티는 폴란드 귀족 마리아 베르노프스카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데리고 고향에 와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이때 토스티가 쓴 노래가 그 유명한 ‘이상 Ideale’이다.
이상적인 자막
한편 단눈치오는 1883년 갈레세 공작의 딸 마리아 아르두앵과 결혼했지만, 7년 뒤 파경을 맞는다. 그 무렵 바르바라 레오니와 만남을 소재로 『쾌락』을 썼고, 『무고한 존재』는 마리나 그라비나 크루일라스 공작부인에게 헌정했다.
‘장미 삼부작’의 마지막 소설 『죽음의 승리 Trionfo della morte』는 원래 선배 시인 조수에 카르두치에게 헌정하려던 것을 최종적으로 친구 미케티에게 바쳤다. 바그너의 악극과 니체의 초인사상 대한 노골적인 예찬인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바이로이트 극장과 <트리스탄과 이졸데>을 순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단눈치오는 주인공 조르조를 트리스탄으로, 이폴리타를 이졸데로 조종하려는 인형사(人形師)이다.
리처드 기어 아님!
1895년 그의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대배우 엘레오나라 두세와 교제를 시작했고, 그녀를 매몰차게 떠날 때 소설 『불 Il fuoco』를 발표한다. 주인공 스텔리오는 베네치아의 시인이며 그는 유명한 배우 포스카리나와 연인관계이다. 곧 단눈치오와 두세를 의미한다. 이탈리아 예술의 우수성을 주창하는 스텔리오는 베네치아에서 노년을 보내는 바그너 예찬자이기도 하다. 포스카리나는 그의 자유로운 창작에 스스로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그를 떠나 세계를 여행하기로 한다. 바그너가 벤드라민 궁전에서 사망하자, 스텔리오는 여섯 운구자 가운데 하나로 위대한 음악가의 관을 어깨에 진다. 바그너 신봉자의 최전선에 선 단눈치오는 성배의 기사 파르지팔을 자처하며 두세를 기사의 연인이자 요부인 쿤드리로 설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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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눈치오는 소설에서 바그너의 먼 뿌리가 고대 그리스 비극임과 그것이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부활했음을 마땅히 선언한다. 피렌체의 카메라타와 줄리오 카치니, 야코포 페리 그리고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의 <육체와 영혼의 극>의 탄생을 열렬히 나열하는 것이다. 그는 베네치아 프라리 교회에 묻힌 위대한 몬테베르디가 300년 전 만토바 궁정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순간을 자랑스럽게 회고한다. 그런 뒤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성배의 왕 암포르타스의 고뇌가 팔레스트리나의 모테트 <매일 죄를 짓나니 Peccantem me quotidie>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스텔리오와 포스카리나는 넋을 잃고 서로를 응시하며 황홀경을 만끽한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암포르타스와 팔레스트리나라니!
‘트리스탄’인 동시에 ‘파르지팔’인(그러니 그의 여인들은 누구이겠는가!), 허세 가득한 단눈치오는 토스티의 60세를 축하하는 선물로 그를 위한 시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완성했을 때는 이미 61세가 된 1907년이었다. 그 가운데 『아마란타의 네 개의 노래』는 단눈치오 자신의 체험을 녹인 시이다. 그리스어에 뿌리를 둔 아마란타는 ‘시들지 않는 꽃’이란 뜻이며, 단눈치오는 1906년에 만난 피렌체의 백작부인 주세피나 만치니를 아마란타라고 불렀다. 와인 제조업자의 아내였던 그녀와의 관계는 감미로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자괴감을 주었다. 그는 랜슬럿이 친구 아서왕의 아내 기네비어와 만났을 때나, 바그너가 비단 상인 베젠동크의 아내 마틸데와 밀회할 때처럼 불안하고 덧없는 사랑을 이어갔다.
내려앉으라, 사랑의 밤이여!
『아마란타의 네 개의 노래』는 단눈치오가 그때까지 쓴 모든 작품과 그의 뿌리인 셸리, 바그너, 니체를 전제로 한 시였다. 또한 오랫동안 대중 오페라에 몰두하느라 진정 예술적인 가사에 노래를 붙이는 데에 소홀했던 이탈리아가 독일 리트에 부끄럽지 않은 결과로 내놓은 기념비였다. 덕분에 이 노래를 부른 음반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아리아 모음집 틈에서 오랫동안 잊은 이탈리아 노래의 자존심을 당당히 내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