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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pr 27. 2022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존 키츠의 ‘비우는 능력 Negative capability’에 대해

<브라이트 스타>의 음악은 주연 벤 위쇼의 파트너 마크 브래드쇼가 맡았다. 두 사람은 촬영장에서 만났고 영화 중 문학 살롱의 아카펠라 음악회에서 브래드쇼가 지휘를, 위쇼가 독창을 맡는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모차르트 세레나데 10번 ‘그랑 파르티타’ 가운데 3악장이다. 모차르트가 이 곡을 쓴 것은 1781년이고 그는 10년 뒤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 배경은 1818년 영국이니, 곡이 작곡된 지 대략 40년, 모차르트 사후 3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다. 

이것은 파이프오르간이다

<그랑 파르티타>가 영국에 알려졌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목관 합주곡을 남성 아카펠라로 부를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 아니 피터 셰퍼는 이 곡의 의미를 한 단어로 압축했다.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Unfulfillable longing’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낭만주의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며, 키츠가 말한 ‘비우는 능력 Negative capability’과도 상통한다. ‘부정적인 능력’으로 직역하기도 하는 키츠의 개념은 아래와 같이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한다.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엄청나게 소유한 자질, 특히 문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형성하는 자질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것은 곧 ‘비우는 능력’이며, 사람이 사실과 이성을 성급하게 추구하지 않고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1817년)     

셰익스피어는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나 키츠 모두 가장 이상적인 본보기로 삼은 작가였다. 앞서 말한 모차르트가 낭만주의에 던진 파문은 영화 마지막에 키츠가 「나이팅게일 찬가」 전문을 낭송할 때 다시 불린다. 사실 이 부분이 영화의 치명적인 오점이다. 벤 위쇼의 감미로운 낭송에 또 다른 보칼리제와 첼로 반주까지 중첩하면서 청각은 돌이킬 수 없이 손상된다. 그 유명한 ‘밤은 부드러워 Tender is the night’가 처연하게 들린다. 마지막 구절의 예고인가! “음악은 사라졌다. 생시인가, 꿈인가? Fled is that music:- Do I wake or sleepy?”     

2:36 "Tender is the night"

만일 위쇼가 다른 소리나 눈을 괴롭히는 엔딩 크레디트의 간섭 없이 낭송했더라면, 우리는 진동하는 프로방스의 향기에 취해 부드러운 밤을 만끽했을 것이다.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 『밤은 부드러워』을 쓴 스콧 피츠제럴드의 낭송이 남아 있는 것이 놀라운데, 제일 앞 두 연뿐이라 아쉽다. 이것이야말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다.    

우리 집에 인터넷이 깔렸을 때 리얼오디오로 들었던 TS 엘리엇의 '황무지' 낭송이 생각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낭송도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과도하게 섞인 데다가 음향 편집에서 저음역을 더욱 증폭한 바람에 부자연스럽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아니라 리처드 3세네

오스카 와일드로 기억되는 스티븐 프라이가 꾸밈없이 읽어 내려갔는데, 이번에는 화면이 너무 무성의하다. 창밖 풍경은 키츠 시에 대한 모독이며 프라이는 광대에게나 어울릴 의상을 입었다.

워윅의 톰이 놀랄 일이다!

<라임라이트>의 클레어 블룸을 아는 사람이라면 중성적이고 앳된 그녀의 음성에서 위쇼가 연기했던 『템페스트』의 에어리얼이나, 『한여름 밤의 꿈』의 퍽을 떠올릴 것이다.

채플린 옆에 있다가 우나를 닮은 듯, 우나가 클레어를 닮은 건가?

제인 캠피언이 낭송과 모차르트를 뒤섞어 심상을 망쳤지만, 존 에반젤리스트 월시에 따르면 키츠가 들었던 확실한 음악은 하이든이다. 키츠와 로마에 동반한 세번은 음악교사의 아들이었고, 피아노를 곧잘 쳤다. 주치의 제임스 클라크는 이들에게 악보를 많이 구해줬고, 하숙집 여주인은 피아노를 빌려주었다. 세번은 키츠가 자신의 연주 가운데 하이든 소나타를 특히 좋아했다고 적었다. 하이든이 “다음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린아이와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이든의 ‘천진난만함’ 또한 키츠가 말한 ‘비우는 능력’의 영역에 있다. 

하이든이 런던에서 작곡한 마지막 네 소나타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베토벤과 같은 명연주자가 아니었으므로, 세번과 같은 아마추어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이든은 두 차례의 영국 방문을 통해 섬나라에 잘 알려졌다. 키츠의 시와 어울릴 음악은 어떤 것이 맞는가?     

천진난만

시인이나 소설가를 강연에 모신 일이 몇 번 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대가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작시나 소설을 낭독하는 중에 내가 음악을 틀어주길 원했다. BGM이란, 음악이 얼마나 값없이 남용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선곡도 어려울뿐더러 내가 아는 음악이 설마 그들의 ‘대단한’ 글재주를 뒷받침할 목적으로 작곡되었을까! 심지어 키츠의 시도 편곡된 모차르트와 겹칠 때 서로 누를 끼치를 데 말이다! 우리가 아는 작곡가들은 모두 그 둘을 동시에 빛나게 만든, 믿을 수 없는, 비우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차이콥스키가 아니라면 괴테나, 하이네, 푸시킨을 노래로 부를 수 있다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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