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40도의 폭염이 훑고 지나간 이탈리아는 9월에도 아직 잔열이 상당했다. 2주 동안 밀라노, 베로나, 돌로미티, 로마, 나폴리를 남은 퍼즐 조각 맞추듯 숨 가쁘게 돌았다. 연재를 통해 간추려본다.
이탈리아를 찾는 한국인은 대개 로마나 밀라노 공항으로 입국한다. 모든 길이 통하는 로마야 말할 것 없고 밀라노도 그 못지않은 중요한 관문이다. 평소 로마를 주로 이용하는 나는 이번에 밀라노로 들어갔다. 다음 목적지인 베로나와 가깝기 때문이다.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 밀라노는 지역을 넘어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많은 제품이 포장재에 ‘뉴욕, 런던, 도쿄, 밀라노’ 따위의 문구를 보증처럼 써왔다.
밀라노 수호성인 성 암브로시우스를 기리는 사원
내 주위에 밀라노를 자주 찾는 사람은 세 부류이다. 밀라노에서 열리는 산업 박람회가 주 무대인 전문인, 패션과 디자인 분야에서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창작자, 오페라 애호가로 라 스칼라 극장을 안방처럼 드나드는 애호가이다. 그런데 일정이 바빠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보지 못했다는 경험담이 허다하다. 그들에게 스키라 출판사가 낸 <밀라노: 열 개의 걸작>이라는 소책자를 보여주고 싶다. 밀라노가 자랑하는, 놓치지 말아야 할 보물들은 다음과 같다.
1.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젊은 여인의 초상>
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브레라 제단화>
3. 안드레아 만테냐 <그리스도 주검 위의 슬픔>
4.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5. 라파엘로 <동정녀의 결혼식>
6. 미켈란젤로 <론다니니의 피에타>
7. 카라바조 <과일 바구니>
8. 프란체스코 아예츠 <입맞춤>
9.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 <제4계급>
10. 움베르토 보치오니 <갤러리의 폭동>
<최후의 만찬>이야 설명이 필요 없고, 2, 3, 5, 8, 10번을 소장한 브레라 미술관은 밀라노 기행의 필수 코스이다. 이번에 밀라노에 체류하는 가장 큰 목적은 1, 7번 그림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이 소장한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는 최초의 정물화로 꼽히는 걸작인데, 예전엔 이곳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기억으로만 남았지만, 이젠 내부를 갤러리처럼 꾸며 완전히 달라졌다. 도서관은 몇 년 전에는 작은 축소 카피로만 전시했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스케치도 따로 마련한 방에 걸어 그 원대한 계획을 한눈에 보게 했다. 도서관을 세운 인문주의자 보로메오 추기경(1564-1631)이 기뻐할 일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스케치
머뭇거릴 틈 없이 7번을 보러 폴디 페촐리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전만 해도 폴라이우올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심하게 찍은 사진 몇 장뿐. 그런데 2021년에 나온 음반 하나가 나를 뒤흔들었다.
이 음악 때문에 간 것이었다
북독일 태생 필리프 하인리히 에를레바흐(1657-1714)는 생애 대부분을 튀링겐의 궁정악장으로 일했다. 바흐, 헨델보다 한 세대 선배인 그는 사후 1천 곡에 가까운 악보 대부분이 불탄 탓에 오랫동안 간과되었다. 남은 70여 곡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앨범에 발췌된 소나타와 아리아집 <음악 친구들의 조화로운 기쁨 Harmonische Freude Musicalischer Freunde>이다. 매혹적인 성악과 기악이 어우러지는 아리아는 틀림없는 바흐의 뿌리이며, 소나타에는 최상급 이탈리아 감성이 녹아 있다. 음반 커버를 폴라이우올로의 <젊은 여인의 초상>으로 쓴 안목은 탁월했다. 바로 열 개의 밀라노 보물 가운데 하나이다.
폴리이우올로의 그림들
마침 올여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으로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아폴로와 다프네>가 국내에 들어와 새삼 폴라이우올로의 참모습을 엿보았던 터이다. 드디어 폴디 페촐리 박물관의 제일 안쪽 ‘황금의 방’에 도착했다. 여인은 마치 ‘음악 친구들’의 숭배 대상인 양 꼿꼿하고 단정한 옆모습으로 화가의 모델이 되었다. 머릿속에 바이올린과 오르간이 반주하는 음률이 흐른다.
마르거라, 뜨거운 눈물이여 / 눈이여, 더 밝아지라 / 한숨아, 더는 일어나지 말아라 / 태양이 솟아오르리니
앞서 말했듯이 나는 밀라노가 아닌 로마로 주로 드나든다. 밀라노는 현대보다 고전에 무게 중심을 둔 나에게 이류 도시이다.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는 자신들이 자랑할 보물을 고작 ‘열 개’로 추리지 않는다. 심지어 밀라노 보물의 창작자 가운데 밀라노 태생인 사람도 없고, 대부분 밀라노 밖에서 만든 것이다. 과거 밀라노는 남쪽 도시들에 비해 문화적으로 열등했다. 르네상스 시대 밀라노 군주 갈레아초 스포르차는 한껏 으스대며 피렌체를 방문했다가 그곳의 드높은 문화 수준에 주눅 들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 ‘위대한 자’ 로렌초가 허영심 많은 밀라노 군주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보내준 덕에 <최후의 만찬>이 탄생했다.
내 보기에 밀라노의 강점은 ‘편집’에 있다. 편집은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작품을 아이콘으로 만든다. 암브로시안 도서관과 브레라 미술관, 폴디 페촐리 박물관이 모두 그런 본보기이다. 카라바조, 만테냐, 라파엘로, 폴라이우올로 등은 밀라노 태생의 예술가가 아니지만, 수집가는 뛰어난 안목으로 시대의 대표작을 한데 모았다.
밀라노 폴디 페촐리 미술관_15세기 플랑드르 무명작가의 제단화
라 스칼라에 이르면 그런 편집과 조합의 능력은 극대화된다. ‘오페라’가 바로 여러 예술, 곧 ‘오푸스’의 복수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밀라노는 부족한 창작력을 수집과 큐레이션으로 극복한 좋은 예이다. 현재의 밀라노가 누리는 선도적인 영향력은 선조들의 그런 안목 덕분이 아닐까? 그것이 밀라노에서 뭔가 자기 길을 찾으려는 사람이 ‘열 개의 보물’을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손가락이 아닌 가리키는 곳을 보기 위해서!
축제 100주년을 기리는 베로나 아레나 앞 현수막
저녁에 날아갈 듯이 베로나로 향한다. 난 축제의 마지막 세 공연을 볼 예정이다. 로마 시대부터 물자가 넘쳐 사람이 몰리고 살림살이가 풍요로웠던 이곳에 아레나가 들어선 것은 당연하다. 밀라노에서 언급한 빼어난 편집력은 베로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팔라초 마페이 박물관과 아킬레 포르티 근대 미술관이 그 예이다. 그러나 베로나가 첫 손꼽을 위인은 테너 조반니 체나텔로(1876-1949)이다. 그가 바로 고향의 유적인 원형극장을 되살린 사람이다. 1904년 푸치니의 <나비부인>이 초연될 때 핑커턴을 불렀던 체나텔로는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리던 1913년에 아레나에서 툴리오 세라핀의 지휘로 <아이다>를 무대에 올려 축제의 막을 올렸다. 올해로부터 정확해 100년 전의 일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프란코 체피렐리의 <나비부인> 무대
또 한 번의 도약은 1947년에 이뤄졌다. 체나텔로는 그리스 태생의 무명 소프라노를 오디션 했다.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주역을 따낸 그녀가 역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마리아 칼라스이다. 축제와 칼라스에 더해, 올해 아레나는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한 사람의 탄생 100주기를 기린다. 바로 이 도시가 무대인 불멸의 러브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을 영화로 만든 감독 프랑코 체피렐리이다. 이날 밤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체피렐리의 연출을 다시 올렸다. 소박한 일본 시골의 정경을 펼칠 무대는 거대했지만, 체피렐리의 빈틈없는 계산으로 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나비부인 초초상의 최후를 열연하는 아스미크 그리고리안
리투아니아 소프라노 아스미크 그리고리안은 최근 몇 년 사이 으뜸의 무대 잘츠부르크 여름 축제를 비롯해 세계 오페라의 중심에서 빠지지 않는 손님으로 대우받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개성 있는 음색과 탁월한 배역 소화로 걸작의 주인공을 꿰차는 중이다. 객석에서 무대까지 거리가 먼 베로나이지만 가련한 게이샤가 된 그녀의 존재감은 손짓마다 음절마다 차고 넘쳤다. 나비부인이 핑커턴에게 버림받았음을 알고 할복하는 처연한 피날레에서 체피렐리가 만든 일본 이미지가 선홍색을 발할 때 체나텔로, 칼라스, 체피렐리의 얼굴이 차례로 뇌리를 스쳤다. 내일과 모레 <아이다>와 <라 트라비아타>를 기대하며 밤새워 북적일 브라 광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