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이탈리아 기행 (2) - 파도바와 비첸차
에비뉴엘 2023년 11월호 게재
베네치아 공화국 1천 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것이 운하 사이로 관광객 넘치는 인공섬 도시만의 것은 아니다. 처음 이교도 훈족에게 쫓겨 석호(潟湖)로 피했던 베네치아 사람들이지만, 장차 이곳의 최강자가 된 뒤로 그들은 서쪽으로는 베로나에서 동쪽으로는 아드리아해 건너 크로아티아까지 장악했다. 물론 바다에선 전 지중해를 호령했던 베네치아이다. 도시의 어원인 베네토(베네티인의 땅)는 지중해와 알프스 이북을 잇는 지리상의 노른자위이다. 그러니 포강 유역 비옥한 토지에 자리한 베로나, 비첸차, 트레비소, 파도바와 같은 배후 도시의 이야기 또한 베네치아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다.
작년 가을 나는 베네토 지방에서 발품을 팔았다. 파도바(영어로는 ‘파두아’라고 부른다)는 베네치아로 가는 길목이다. 피사 태생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1592년, 볼로냐 대학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파도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며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점차 중세 우주관에서 벗어나 지구가 태양을 도는 여러 행성의 하나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갈릴레오의 아버지 빈첸초는 최초의 오페라 탄생에 힘을 보탠 음악가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쓴 것도 동갑내기 갈릴레이가 파도바에 온 것과 같은 무렵이다. 희곡의 무대는 파도바이며, 주인공 페트루키오는 베로나 태생이다. 그와 동서지간이 될 루첸티오는 갈릴레이처럼 피사가 고향이며, 파도바 대학에 청운의 꿈을 품고 왔다가 아름다운 비안카와 결혼한다. 갈릴레이가 밤하늘의 별을 보는 동안 셰익스피어는 파도바의 부조리한 결혼 풍속을 파헤쳤다.
파도바 성 안토니우스 대성당은 갈릴레이와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이전인 14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성당 안팎은 르네상스 초기 조각가 도나텔로의 걸작으로 유명하다. 용병대장 가타멜라타의 기마상과 성당 재단의 성모자 및 성인 군상이다. 도나텔로의 재단 조각 봉헌을 축하하기 위해 당대 제일의 음악가 기욤 뒤파이가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미사>를 작곡했다.
어려운 천문학을 모르는 사람도 갈릴레이의 피사 사탑 실험이나 그가 종교재판에서 뒤돌아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는 속설은 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몰라도 셰익스피어가 세계문학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얼마나 큰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못지않게 중요한 음악가 기욤 뒤파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다. 뒤파이를 비롯한 르네상스 음악 대부분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겨우 실체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소리 없이 악보로만, 그것도 도서관 깊숙이 아무의 손도 닿지 않은 채 존재하던 많은 음률이 마치 나비가 고치를 뚫고 세상에 나오듯이 터져 나온 지 채 얼마 되지 않았다.
르네상스 음악을 가장 궁금해했을 사람은 아마도 영화 음악가들일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감독 프란코 체피렐리는 그보다 한 해 전인 1967년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내놓았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턴이라는 당대 스타 부부를 기용한 화제작이었다. 체피렐리는 두 사람에게 최상급 의상을 입히고 거의 르네상스 것으로 착각할 만큼 공들인 세트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만든 대사를 맘껏 연기하게 했다.
파도바에 가기 전 나는 영화 속 주인공 커플의 결혼식을 눈여겨보았다. 셰익스피어는 연극 무대의 한계 때문에 결혼식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하인들의 입을 통해 전한다. 그러나 체피렐리는 아수라장의 전언을 화려한 무대로 고스란히 재현했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을 직접 보고 체피렐리가 이곳을 결혼식장 모델로 삼았음을 직감했다. 조토가 그린 예배당 프레스코는 20년 이상 연구와 복원 작업 끝에 2002년에야 일반에 공개되었고, 2015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되었으니, 체피렐리 영화의 빛이 바래는 동안 서로 연결 지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관람객은 20분 동안 대기실에서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내력에 대해 안내받으며, 체내 습도를 낮추고 먼지를 제거해야 겨우 20분 동안 예배당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밀어내기식으로 입실하면 르네상스식 스토리보드를 만난다.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주제로 한 조토의 프레스코는 복원된 선명한 색상으로 체피렐리의 세트와 경쟁한다. 거기에 소리만 더하면 바로 영화가 될 것이다. 조토 이후 이런 르네상스식 스토리보드가 줄을 이으니, 원근법을 처음으로 구사한 마사초의 피렌체 브란카치 예배당 프레스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아레초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그린 <진짜 십자가 이야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대표적이다.
스크로베니 해설사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가 남편 요아힘과 입 맞추는 그림이다. 나이 들도록 자식이 없던 두 사람은 만일 아이가 생기면 교회에 바치겠다고 기도하고 임신한다. 성벽 아래서 입 맞추고 아이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동정녀 마리아의 이야기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관람객은 성화에서 드물게 보는 로맨스 장면에 한참 동안 미소 지으며 카메라를 들이댄다. 조토도 당대 근엄한 교회의 눈총을 무릅쓰고 이 장면을 그리지 않았을까? 체피렐리는 천하의 파락호 페트루키오와 둘도 없는 말괄량이 카타리나의 난장판 결혼식을 스크로베니 예배당임에 분명한 곳에서 연출하며 두 사람 사이에 꽃필 도저히 불가능할 듯한 사랑을 기대하게 한다.
사실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처음 마주하는 사람은 당황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여자를, 설령 그녀가 아무리 말괄량이일지라도, 험하게 다루고 무릎 꿇려 남편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르네상스 정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는 현대는커녕 전근대 남성 우위 사회에서도 썩 통하지 않을 법한 막무가내이기 때문이다. 물론 셰익스피어나 체피렐리가 그런 점을 몰랐을 리 없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은 그녀가 결혼식 날 치장을 마치고 방에서 나와 아버지에게 손을 뻗을 때이다. “자, 이것이 원하는 것입니까? 기꺼이 연기해 보겠습니다”라는 듯한 고분고분한 손짓은 그 어떤 항명보다 강력하다. 마지막에 남편이 원하는 순종적인 여인상을 연기해 보인 뒤에 그녀는 허락 없이 퇴장한다. 예상보다 더한 순종의 맹세에 흐뭇하던 페트루키오지만 꼼짝없이 그녀 뒤를 따라간다. 말괄량이 아내를 둔 그가 허둥지둥 애처가로 바뀌고 마는 순간이다. 나는 이 두 장면에서 기존 질서와 권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궁극적인 승리를 읽는다. 셰익스피어는 부조리한 당대 결혼 거래를 희극적으로 보여주며 사람들의 깨어남을 주문한다.
영화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음악을 쓴 사람은 계속해서 <로미오와 줄리엣>과 <대부>의 주제 음악으로 영화사에 각인될 니노 로타였다. 그의 왁자지껄한 행진곡은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쓸쓸한 고독의 테마는 연민을 부른다. 그러나 천하의 로타도 아직 르네상스 시대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다. 체피렐리가 아무리 15세기 무대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해도 음악만큼은 20세기 중반 로런스 올리비에가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 썼던 영국 작곡가 윌리엄 월턴의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했다. 원래 미술학도이던 체피렐리가 젊을 때 보고 영화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게 했던 작품이 <헨리 5세>였기 때문이다. 햄릿이 “어긋난 시간 The time is out of joint”을 바로잡으려고 태어났다고 선언한 것처럼, 앞으로 영화 음악가들의 사명은 사람들이 보는 영상과 같은 시대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서사 영화에서 과거를 복원하는 데 가장 힘을 기울인 사람은 알렉스 노스이다. 그는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나온 <고뇌와 환희 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와 커크 더글러스가 주인공을 맡은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1967>의 음악을 쓰며 르네상스와 고대 소리에 가까이 가려 애썼다. 가령 <고뇌와 환희> 가운데 연회 장면에는 20세기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쓴 <옛 춤과 선율 모음곡 2번, 1923>을 모방한 곡이 연주된다. 메디치 궁정의 작곡가 에밀리오 카발리에리가 1589년 프란체스코 대공의 결혼식을 위해 작곡한 간주곡에 뿌리를 둔 선율이니 미켈란젤로 시대에 성큼 다가간 것이다.
그보다 더 오래된, 고대 로마의 노예 반란을 다룬 <스파르타쿠스>에서도 이스라엘 리코더, 유고슬라비아 플루트, 키타라, 둘시머, 백파이프처럼 오래된 이국 악기를 동원했고, 신시사이저의 초기 모델인 온디올린도 사용했다. 노예 봉기에 등장하는 파격적인 불협화음이나 스파르타쿠스와 바리니아의 사랑을 그린 라이트모티프도 한 세기 전 바그너가 완성한 총체예술의 원리를 영화에 완벽하게 접목한 결과이다.
셰익스피어가 구상하고 체피렐리가 고민한 르네상스식 결혼 풍속도와 니노 로타의 시행착오 그리고 알렉스 노스의 진지한 고증 따위는 결국 잊힌 시대의 재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런 노력의 첨단에서 뒤파이의 <성 안토니우스 미사>와 같은 진짜 그 시대 작품이 빛을 본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들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와 경쟁한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사람들이 카타르시스에 빠져 분별을 잃는 것에 반대했다. ‘소외효과’라는 그의 유명한 연극 이론은 사람들이 무대 위와 거리를 두고 늘 깨어있기를 주문했다. 그러기에 가장 유혹적이어야 할 음악도 장면과 멀찍이 떨어져야 했다.
감독 조지프 로지는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오 Galileo, 1975>를 영화로 만들며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 하임 토폴을 주연으로 썼다. 진지하고 고뇌에 찬 르네상스 천문학자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엉뚱하고 장난기 넘치는 동시에 두려움에 떠는 보통 아저씨가 등장한다. 의상과 미술도 체피렐리처럼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브레히트의 서사극 무대처럼 건조하고 상징적으로 꾸몄다.
음악은 브레히트의 동료였던 한스 아이슬러가 맡았다. 그는 배경 음악으로 청중을 현혹하지 않는다. 세 소년의 중창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코러스처럼 의문을 던지고 각성을 요구한다. 그들 외에 나오는 음악이라고는 종교재판을 앞두고 저잣거리의 광대들이 부르는, 모두를 조롱하는 노래뿐이다. 갈릴레이의 고백이 마무리되는 장면에서 장중한 선율이 흐르는 대신 그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일갈한다. 그의 새로운 가설을 증명하는 원고가 격리된 방을 무사히 빠져나간 뒤 창밖에서 지켜보던 소년들은 노래한다. “우린 이미 뒤처졌다”라고. 브레히트와 아이슬러 그리고 로지는 갈릴레오를 ‘어긋난 시간’ 속에 창조해 그를 여전히 살아 있게 만든다.
로지는 체피렐리의 고전적인 연출과 브레히트의 서사극 양식을 한 데 묶는 데 성공한다. 그는 2년 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를 당대 최고 음악가들과 함께 영화로 찍었다. 무대는 모두 베네치아와 비첸차의 빌라이다. 서곡에서 물의 도시에 도착한 주인공들은 무라노의 유리공장을 관광한다. 구경꾼은 곧 관객이다. 시뻘건 유리 물은 돈 조반니의 지옥행을 암시한다.
로지는 르네상스의 골격을 완성한 건축가로 평가받는 팔라디오(Palladio, 1508-1580)의 빌라를 맘껏 드나든다. 도망가던 돈 조반니가 딸의 명예를 지키려는 기사장과 결투하는 장면은 바실리카 팔라디아나에서 찍었다. 돈 조반니의 집은 빌라 로톤다, 돈나 안나의 집은 빌라 칼도뇨이며, 레포렐로는 테아트로 올림피코에서 난봉꾼 주인 대신 붙잡힌다.
가장 공들인 것은 역시 테아트로 올림피코 장면이다. 무대를 앞에 두고 계단식 객석이 부채꼴로 자리하는 그리스 원형극장에 지붕을 덮은 첫 번째 근대 극장이다. 무대도 뒤로 갈수록 좁게 설계해 과장된 원근법으로 실제보다 훨씬 먼 거리감을 주도록 했다. 이것으로 인류는 가상공간 활용의 한 획을 그었다. 어긋난 시간을 바로잡고 때론 바른 시간을 어긋나게 할 전능의 공간이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도, 바그너의 총체예술도, 브레히트의 서사극도 팔라디오의 극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로지의 <돈 조반니>는 그 모든 것을 압축해 보여준다.
이상이 베네치아의 배후 파도바와 비첸차를 돌아다니며 얼핏 스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