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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Sep 20. 2023

뮌헨 분리파와 바그너

변함없는 가치 (4. 끝)

(이어서)


구스타프 클림트나 그가 속한 ‘빈 분리파’보다 그들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뮌헨 분리파’는 훨씬 덜 알려졌다. 분리파란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뜻이다. 예술은 늘 기존 유파에 대한 반발로 전개되었다. 프랑스 인상파, 러시아 이동파(移動派)처럼 뮌헨 분리파도 스승에게 배운 것과 다르게 그리려는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루트비히 1세 - 막시밀리안 2세 - 루트비히 2세

‘도레미 노래’처럼 시작으로 가보자(Let’s start at very beginning)!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1세(1786-1868)는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동경한 대단한 예술 애호가였다. 그는 회화관인 피나코테크와 고미술 박물관 글립토테크를 세웠고, 님펜부르크 궁전과 호엔슈반가우성을 그곳에 걸맞은 그림과 유물로 채웠다. 그 못지않게 숱한 여성 편력을 보인 국왕은 결국 스캔들 때문에 1848년 양위한다.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이 아버지보다 이른 1864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손자 루트비히 2세가 왕위에 오르고, 루트비히 1세는 4년 뒤 니스에서 객사한다.

숲 속에 디즈니 성이

루트비히 2세(1845-1886)는 할아버지가 탐닉한 미의 세계를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가 바그너의 오페라 속 이야기를 실제로 구현했다. 각각 베르사유와 트리아농을 본뜬 헤렌힘제와 린더호프, 그리고 뒷날 디즈니 성의 모델이 될 노이슈반슈타인을 지은 것이다. 이렇게 동화 주인공 같은 19세기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왕가가 닦아놓은 뮌헨의 터전에서 프란츠 폰 렌바흐(1836-1904)라는 화가가 활동했다. 그의 위상은 ‘화가들의 군주 Malerfürst’라는 별칭으로 대변된다. 

렌바흐하우스의 특별전을 보느라 여념 없는 뮌헨 시민들

렌바흐와 교류하며 함께 이집트를 다녀온 빈의 화가가 한스 마카르트였고, 마카르트의 제자가 클림트이다. 렌바흐의 제자 가운데에는 프란츠 폰 슈투크가 가장 두각을 보였다. 슈투크는 스승에게 뮌헨 분리파의 지지를 청했지만 렌바흐는 합류하지 않았다. 3년 뒤 클림트를 중심으로 빈 분리파가 창설되었고, 다음 해 베를린도 운동에 동참했다. 세 도시의 양식을 합쳐 ‘유겐트슈틸 Jugendstil’이라 부르니 불어 ‘아르누보 Art Nouveau’의 독일어 번역이다. ‘새로운 예술’의 내력을 설명하기가 이렇게 복잡하다.

렌바흐하우스와 정원

렌바흐가 지은 피렌체 빌라풍의 건물을 1924년 뮌헨시가 사서 렌바흐하우스 박물관이다. 이곳의 대표적 전시품은 ‘청기사파’로 불리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그림들이다. ‘청기사파’는 뮌헨 분리파에 대한 반발로 분리된 슈투크의 제자들이 주축이다. 그러니 청기사파를 보기 전에 빌라 슈투크를 먼저 다녀오자.

빌라 슈투크 앞의 <싸우는 아마존 Kämpfende Amazone>(1897)

빌라 슈투크는 뮌헨을 좌우로 나누는 이자르강 동쪽에 있다. 렌바흐하우스가 비텔스바흐 왕가의 터전에 있다면, 빌라 슈투크는 ‘섭정공 거리 Prinzregentenstraße’를 지킨다. 섭정공이란 루트비히 1세의 둘째 아들이자 루트비히 2세의 작은아버지로 조카가 죽은 뒤 그의 동생 오토를 대신해 국정을 보았던 ‘수양대군’쯤 되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이 바이에른의 마지막 왕 루트비히 3세이다. 근처의 섭정공 극장 또한 비텔스바흐 왕가의 극장과 경쟁해 온 뮌헨의 중요한 음악당이다. 이렇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자 하는 것’은 정치나 예술이나 매한가지였다.

베토벤은 빠지는 데가 없네

스승 렌바흐의 집과 달리 슈투크는 1898년 고전주의 양식의 빌라를 지었고, 내부는 유겐트슈틸풍으로 꾸몄다. 신화와 상징으로 채운 그림과 현대적 영웅을 숭배하는 장식이 촘촘하다. 스승이 주관한 뮌헨 산업 박람회에서 우승한 <낙원의 수호자 Der Wächter des Paradieses>가 가장 유명하다. 후광을 띤 천사가 보검을 들고 선 그림이다. 뮤지엄숍의 색칠 공부 책이 재밌다. 날개 잘린 그림을 책 한 면에 두고 옆면에 나머지 날개를 완성하라는 것이다. 예술에 완성이 있을까? 미켈란젤로는 만년에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미완의 완성’을 만들지 않았는가!

날개를 그리기 좁네!
덕분에 오래간만에 들어보자: Brahms: Symphony No. 1 in C Minor, Op. 68 - II. Andante sostenuto (Live)

분리파 공통의 숭배 대상인 베토벤은 여기서도 만날 수 있다. 반면 옆 방에 아이가 부는 플루트 소리에 귀를 막은 목신(牧神) 그림 제목은 <불협화음>이다. 뿔은 아비를 닮았으나 짐승 아닌 사람의 다리를 한 것을 보면 아이는 이종교배의 씨이다. 그러니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귀를 틀어막은 판! <불협화음>

렌바흐가 빌라 슈투크에 왔다면 못마땅해 눈을 가렸을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 렌바흐하우스는 스승 슈투크를 거부한 제자들 청기사파에게 방을 내줬다. 반대의 반대는 찬성이라 생각한 건가? 거꾸로 청기사파는 새집이 맘에 들었을까? 점점 구상으로부터 멀어져 추상에 도달하는 칸딘스키의 그림이나 박물관의 명함 격인 마르크의 <호랑이> 앞에 관객이 몰려 있다. 

나 불렀어?

그런데 옆방에 내 귀를 부르는 판의 음악이 들린다. 나는 그곳에 걸려 있을 그림을 짐작할 수 있다. 청기사와 음악의 공감대를 보여주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현악 사중주 2번을 틀어놓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러 예술을 하나로 묶는 ‘총체예술’의 본보기이다. 이 곡의 마지막 악장에는 소프라노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슈테판 게오르게가 쓴 시 ‘황홀경’을 노래한다. “나는 다른 행성의 대기(大氣)를 느낀다”라는 가사처럼 여기에는 미술관 여느 방과는 다른 공기가 감돈다.

다른 행성의 소리는 아래에서
Schoenberg: String Quartet No. 2, Op. 10 - 4. Entrückung (Sehr langsam)

나는 2018년 뮌헨의 한 음악회에서 그런 공기에 완전히 휩싸인 적이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바이올리니스트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는 키릴 페트렌코(현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가 지휘하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1936)을 협연했다. 최초 주어진 열두 개 음을 전후좌우로 비튼다는 면에서 이 협주곡은 칸딘스키의 추상화와 맥을 같이 한다.

오페라 극장의 쇤베르크 협주곡

나는 휴식 시간 우연히 복도에서 만난 코파친스카야에게 사인을 청했고, 그녀는 흔쾌히 멋진 필적을 남기고는 후반부 프로그램인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을 들으러 객석으로 들어갔다. 렌바흐는 후배의 분리파에 가입하길 완고하게 거부했고, 슈투크의 수업을 듣던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는 “이건 아니다”라며 박차고 나왔다. 한편 쇤베르크는 초기에 뜻을 같이하던 칸딘스키가 반유대주의자라 오해하고 그를 멀리했다. 히틀러는 슈투크의 미술을 숭배했고,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쇤베르크의 음악은 반세기 전에 나온 브람스의 교향곡과는 완전히 다른 별의 공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공연 후반부를 청중과 함께 들으려는 협연자 코파친스카야의 세련된 콘서트 매너 덕분에 앞선 모든 반목이 총체적으로 결합한 느낌이었다.

사인받았다!

5년 뒤 같은 극장에서 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았다. 종종 현대음악의 뿌리로 꼽기도 하는 문제작이다. 13세기 중세음유시에 바그너가 직접 쓴 대본의 내용은 이렇다.     

만드라골라를 마신 듯 곤드레만드레 (사진: W.Hoesl)

1막: 콘월 기사 트리스탄은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를 숙부 마르케 왕의 신부로 호위 중이다. 이졸데는 앞서 트리스탄의 칼에 약혼자를 잃었기에 치욕으로 여겨 독을 나눠 마시고 함께 죽으려 한다. 그러나 시녀가 독약 대신 건넨 사랑의 묘약 탓에 두 사람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당신은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사진: W.Hoesl)

2막: 마르케 왕과 결혼 뒤에도 이졸데와 트리스탄의 밀회는 계속된다. 사냥을 나간 왕 몰래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은 끝없는 밤을 찬양한다. 그러나 결국 발각되고, 왕의 심복 멜로트는 트리스탄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팔이 짧네! (사진: W.Hoesl)

3막: 영지에서 죽어가던 트리스탄은 이졸데가 도착하자 이내 숨을 거둔다. 모든 것이 사랑의 묘약 탓임을 알고 마르케 왕이 용서하러 왔지만, 이졸데도 트리스탄 위에서 생을 다한다.

니나 스테메와 스튜어트 스켈턴이 타이틀롤을 받은 엑상프로방스 실황 전곡 (2021)

시종일관 1865년 바그너의 뮌헨 초연 무대와 경쟁하는 폭발적인 팽창감이 청중을 압도했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가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불륜을 저질렀음을 알고도 초연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아마도 왕은 스스로 트리스탄이라 여겼을 것이다. 바그너에게 몰두하느라 국고를 탕진하고 은둔하던 루트비히 2세는 뮌헨 남쪽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루키노 비스콘티 <루트비히> 예고편

생전에 그가 사모했던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엘리자베트(일명 ‘Sissi’)였으니 그녀는 루트비히 1세의 조카이자 루트비히 2세와는 5촌 사이였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이종사촌 간으로 루트비히 2세는 황제의 조카이기도 했다. 이졸데의 마지막 노래 ‘사랑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영욕이 극장 안에 녹아 흘렀다. 다섯 시간이 넘는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니 밤이 어슴푸레했다. 여전히 지붕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펄럭였다.

러시아를 가까이했던 죄책감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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