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관현악에 대해
요하네스 브람스가 한 사람 더 있다면 어떤 반응일까? 오페라의 시대인 19세기에 교향악과 실내악, 가곡에 몰두한 또 한 사람의 외골수가 심지어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각각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첼로 소나타, 피아노 트리오 따위의 곡을 남겼으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탈리아 초연을 지휘한 사람의 이름은 주세페 마르투치(Giuseppe Martucci, 1856-1909)이다.
푸치니보다 두 살 많은 마르투치는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고도시 카푸아에서 태어났다. 카푸아는 18세기 나폴리 부르봉 왕가의 궁전이 있는 카세르타와 붙어 있고, 로마의 콜로세움 다음으로 큰 원형 경기장이 있던 풍족한 곳이다. 마르투치는 나폴리 음악원에서 베냐미노 체시에게 피아노를, 파올로 세라노에게 작곡을 배웠다. 특히 체시는 리스트의 라이벌 지기스문트 탈베르크에게 배운 사람이었기에 베토벤과 슈만 같은 독일 작곡가에 열광했다.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역시 피아노의 재능이었다. 마르투치는 뒷날 여왕이 될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 공주가 주관하는 퀴리날레 궁전 음악회에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루빈스타인 이후 최고”라는 격찬을 들었다. 19세의 나이에 국외 연주 여행을 다닐 정도로 조숙했던 그는 1877년 첫 주요작인 피아노 오중주를 발표했다. 마르투치는 밀라노 사중주 협회 경연에서 우승한 이 곡을 후원자였던 프란체스코 밀라노 공작에게 헌정했다. 오페라 일색인 이탈리아에 기악의 필요성을 절감한 공작은 젊은 마르투치를 위해 ‘오케스트라 네아폴리타나’를 창설했다. 이듬해를 파리에서 보낸 청년은 구노, 생상스, 마스네와 만나면서 한층 성장했다. 이때 작곡한 눈부신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놀랍게도 연주하지 않은 채 1895년 출판할 때까지 묻어두었다.
산 카를로 극장 단원이 주축이 된 오케스트라 네아폴리타나는 1881년 1월 23일 첫 공개 연주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처음부터 마르투치의 관심사는 남부 이탈리아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비롯해 베를리오즈와 브람스의 교향곡을 나폴리에 처음 울려 퍼지게 했다. 그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역시 미지의 영역이던 장 필리프 라모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음악을 프로그램에 포함하고 피아노로 편곡했다. 1884년 토리노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자신의 악단을 이끌고 참가한 마르투치는 이탈리아 오케스트라 연주 시리즈 총 34회 가운데 3회를 맡아 그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작 관현악곡이었다. 피아노 협주곡 2번(브람스의 협주곡이 모델이었다)은 1886년 1월 31일 나폴리에서 직접 초연했다. 뒷날 밀라노에서 마르투치의 협연으로 이 곡을 지휘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오랫동안 작곡가의 지지자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1911년 2월 21일 뉴욕에서 지휘한 마지막 공연에서 마르투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에르네스토 콘솔로의 피아노 연주로 무대에 올렸다.
피아노 협주곡으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마침 공석이 된 볼로냐 음악원 감독으로 부임한다. 종교 음악의 중심이던 성 페트로니오 교회의 합창 지휘도 겸한 마르투치는 1888년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탈리아 초연을 지휘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공연을 직접 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숙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르투치 덕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얼마나 엄청난 벨칸토 작품인지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 무렵 마르투치는 마침 볼로냐를 지나던 그의 우상 브람스와 뜨겁게 조우했다. 상대방 나라말을 몰랐던 두 사람이지만 노래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브람스의 첫 교향곡이 그랬듯이, 6년의 노력 끝에 1895년 빛을 본 마르투치의 첫 교향곡이지만 작품은 오히려 바그너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볼로냐 재임 당시 그가 길러낸 제자가 오토리노 레스피기였다. 마르투치에게 작곡과 음악사를 배운 레스피기는 1900년 겨울 황실 극장 비올리스트로 러시아를 방문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배웠고 이듬해 볼로냐로 돌아와 졸업시험을 쳤다. 그가 제출한 피아노 오중주를 가리켜 마르투치가 한 말은 유명하다. “그는 이미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다.” 레스피기와 동료였던 알프레도 카셀라 또한 마르투치의 조언 덕에 이탈리아에 남지 않고 일찌감치 파리로 유학했다. 그곳에서 들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의 초연은 카셀라의 방향을 설정해 준 계기가 된다.
마르투치는 생애 만년인 1904년 나폴리에서 완성한 교향곡 2번을 밀라노로 가져가 직접 지휘해 초연했고, 토스카니니는 이후 이 곡을 여러 차례 무대에 올렸다. 그는 이미 브람스나 바그너와 같은 독일 작곡가의 영향을 넘어 자신만의 확고한 음악 언어를 확립했다. 영국의 동료 작곡가 스탠퍼드의 <아일랜드 교향곡>이나 프랑스의 뱅상 댕디,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즉각 반응한 그는 관현악에 대한 이탈리아의 각성을 그치지 않고 촉구했다. 1908년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과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을 지휘한 그는 그해 12월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1880년대에 태어난 또 한 사람의 후배인 잔 프란코 말리피에로는 마르투치를 “완전한 의미의 천재”로, 그의 교향곡 2번을 “이탈리아 비(非) 오페라 음악 르네상스의 출발점”으로 꼽았다.
마르투치 음악의 특성은 크게 셋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실내악과 관현악이 누구보다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곧 독일 음악의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둘째, 피아노곡들은 프레스코발디, 스카를라티, 라모와 같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의 영향을 담았다. 끝으로 그가 초연한 바그너 음악과 연결 짓지 않을 수 없는 <추억의 노래 La canzone dei ricordi>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소설은 마치 마르투치에게 음악을 자문받은 것처럼 읽힐 정도이다. 세기말 로마의 살롱을 예리하게 포착한 소설 『쾌락』에서 여주인공 돈나 마리아는 살리에리의 짧은 아리아를 부르고, 르네상스 작곡가 레오나르도 레오의 <토카타>와 라모의 <가보트>, 바흐의 <지그>를 연주한다.
그녀의 손끝에서 18세기 음악이 훌륭하게 되살아나서, 무도곡 분위기에 우수가 더해졌다. 성 마르틴의 나른한 오후에 인기척 없는 정원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와 석상 없는 대좌 사이에서, 시들어 떨어져 수북이 쌓인 장미 꽃잎 위에서,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아 곧 헤어질 연인의 춤을 위해 작곡된 것만 같았다.
단눈치오가 그린 또 다른 음악회는 “멘델스존의 사중주로 시작했다”. ‘미뉴에트’ 악장이 지난 추억을 소환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멘델스존의 세 번째 사중주이다. 역시 단눈치오는 감상적이고 차분하며 엄숙한 ‘안단테’에 이어 피로감 가득한 단조로운 리듬의 ‘피날레’를 언급한다.
다음 곡은 “브람스의 사중주 C단조”이다. 그렇다면 현악 4중주 1번이다. 이 곡을 들어봤냐는 연인의 물음에 남자는 “2악장이 경이롭다”라고 말한다. ‘로만체’니까 당연하다! 정작 단눈치오의 경이로운 서사는 3악장(Allegretto molto moderato e comodo)과 함께 시작된다. 남자는 머릿속에서 눈앞의 먹잇감과 과거의 연인 사이를 오가다 두 사람의 접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파생될 세 번째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꿈꾼다. 4악장은 더는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상 단눈치오가 바그너가 지배하는 욕망의 세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데에 브람스를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