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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Jan 22. 2024

현역 작곡가 비발디

베네치아 바르바로 궁전과 콘타리니 궁전 사이로

노블레스 매거진 2024년 2월호 게재


베네치아 본섬의 중심부를 벗어나 옛 조선소와 비엔날레가 열리는 공원 쪽으로 가다 보면 부둣가에 성모 마리아의 사촌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피에타 교회(Chiesa della Pietà)가 나온다. 바로크 시대에 한 붉은 머리카락의 사제(司祭)가 이곳에서 보육원 여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사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타원형 예배당의 천장에는 티에폴로가 그린 같은 모양의 프레스코가 구석에 놓은 비발디의 두상을 내려다본다. 네 계절의 순환을 담은 <사계>는 만토바 궁정의 위촉으로 작곡되었고, 다른 여덟 개 협주곡과 함께 <화성과 창의의 시도 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라는 제목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사계>의 천변만화하는 멜로디는 비발디가 직접 쓴 소네트와 상응해 듣는 이의 공감각을 증폭시킨다.

자동차 광고가 걸린 건물이 피에타 교회이다

<사계>는 1939년에 첫 음반이 나온 뒤 이따금 녹음이 이어지다가, 1955년 이 무지치(I Musici) 앙상블의 앨범이 발매되면서 일약 클래식 음악의 대명사로 부상했다. 이 무지치는 잇따른 후속작(1969, 1982, 1990, 1995)으로 일약 이 곡과 동일시되었다. 더불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서 나이절 케네디(Nigel Kennedy)까지 숱한 음반이 시대를 풍미했다. 20세기말부터는 역사적 해석 연주(작곡 당대 스타일을 복원하려는 노력이다)가 더해지며, <사계>는 2011년에 이미 천 가지 넘는 녹음을 헤아렸고, 누적 판매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진화하는 사계

그런데 비발디는 그의 시대 이래 계속해서 사랑받아 왔을까? 일단 첫 녹음이 1939년에 나왔다는 점은 녹음기술의 탄생 이후로도 거의 반세기 동안 이 곡이 잊혔음을 의미한다. 오페라나 교향곡처럼 훨씬 길이가 긴 곡들도 이미 전곡반이 숱하게 나왔음을 생각하면 뜻밖의 일이다. 비단 <사계>뿐이랴!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목조다리로 운하 건너편과 연결된다. 아카데미아 미술관 건너편은 커티스 가문의 바르바로 궁전(Palazzo Barbaro)이 있다. 커티스 가문의 초대를 받은 폴리냐크 대공 부부는 바르바로 궁전에서 운하 건너편 성을 보았고, 그곳에 살기로 마음먹는다. 대공비는 남편 생일에 콘타리니 궁전(Palazzo Contarini Polignac)을 선물했다. 본명 위나레타 싱어(Winnaretta Singer)인 대공비는 재봉틀로 큰 부를 이룬 아이작 싱어(Isaac M. Singer)의 상속녀 가운데 하나였다.

현대 음악의 뮤즈, 위나레타 싱어

대공은 여덟 달 뒤에 세상을 떠났지만, 위나레타는 파리와 베네치아를 오가며 음악계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여우 르나르>, 에리크 사티의 <소크라테스>, 다리우스 미요의 <오르페오의 불행> 등이 그녀의 위촉으로 빛을 보고 헌정된 작품이다. 특히 프랑시스 풀랑크의 <두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마누엘 데 파야의 <페드로 장인의 인형극>은 위나레타가 193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음악제 명예 회장일 때 소개되었다. 그 밖에 이사도라 덩컨, 장 콕토, 클로드 모네, 세르게이 댜길레프, 르코르뷔지에와 같은 각계 명사와 클라라 하스킬, 디누 리파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등의 음악가가 살롱에 드나들었다. 그 가운데 특별한 커플이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그의 정부(情婦)인 바이올리니스트 올가 러지(Olga Rudge)였다.

올가 러지에게 헌정된 조지 앤타일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파운드의 이름은 현대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T. S.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 The Waste Land, 1922>에 가장 값있게 쓰였다. 이 시는 ‘탁월한 창조자 에즈라 파운드에게’라는 헌사로 시작한다. 파운드는 엘리엇의 초고를 절반 길이로 줄이고 내용도 많이 조언했다. 같은 해 파운드는 <율리시스 Ulysses>를 출판하지 못하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를 도와 소설에서 엘리엇의 시와 같은 성과를 일구게 했다. 그러나 정작 파운드 자신이 평생 매달린 <칸토스 Cantos>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무솔리니에게 협력하고 반유대주의를 주창했던 파운드는 전후 미국으로 송환되어 반역죄로 재판받았다. 과대망상증을 진단받아 처형 대신 정신 병원에 수감된 그를 엘리엇이나 헤밍웨이가 구명했지만,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1958년의 일이다. 이후 베네치아로 돌아가 점차 잊히던 파운드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파운드를 알리고 그를 오해의 구렁텅이에서 끌어내고자 노력한 이는 애인 러지였다. 그녀는 1996년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파운드와 살던 베네치아 집(‘숨겨진 둥지’라 불렀다)을 지켰다. 두 사람은 20세기 전반 비발디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     

에즈라 파운드 이름만 걸린 숨겨진 둥지

1743년 후손이 없는 비발디가 죽은 뒤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악보는 여러 손을 거쳐 제네바 귀족 자코모 두라초 백작(Giacomo Durazzo)에게 넘어갔다. 100년 넘게 잠자던 비발디의 음악은 19세기말 두라초 가문의 악보가 한 신학교에 기부되면서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그 진가를 알지 못했고, 다시 매물로 나온 것을 토리노 국립 도서관장 루이지 토리(Luigi Torri)와 그의 친구인 음악학자 알베르토 젠틸리(Alberto Gentili)가 발굴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야 비발디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이다.


파운드와 러지는 1924년 파리의 위나레타 살롱에서 처음 만났다. 1930년대에 제노바 인근 라팔로(Rapallo)에 살던 커플은 비발디의 기악곡 목록을 작성했다. 위나레타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러지가 빛을 보게 한 비발디의 협주곡은 삼백 곡이 남는다. 러지는 1938년 베네치아에 비발디 연구소(Centro di Studi Vivaldiani)를 열었다.     

소설 <비발디 사건>의 작가이기도 한 사르델리가 비발디를 인터뷰하고 있다. ㅋㅋㅋ

나이브 음반사는 20세기말부터 토리노 국립 박물관의 비발디 소장 악보를 음반으로 발매 중이다. 450개가 넘는 작품을 망라하는 녹음은 지난해까지 71집이 완료되었다. 그런데 초기 음반 내지에 소개되었던 파운드와 러지의 기여는 얼마 뒤에 사라졌다. 지휘자이자 음악학자로 비발디 권위자인 페데리코 마리아 사르델리(Federico Maria Sardelli)가 소설 <비발디 사건 L’affare Vivaldi, 2015>에서 지적한 점 때문이리라. 원래 비발디를 발굴한 토리와 젠틸리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파운드는 수중에 떨어진 비발디 발굴의 공을 파시스트 정권의 업적으로 돌리는 데 앞장섰다. 사르델리는 비발디 작품 번호의 출판자로 유명한 페터 리욤(Peter Ryom)의 작업을 이어받아 연구와 녹음을 이어가고 있다.

베네치아 산 미켈레에 안장된 파운드와 러지

결국 파운드와 러지는 순수하지 못한 열정 탓에 최소한의 공마저도 인정받지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을 후원한 폴리냐크 대공비의 궁전 바로 옆에는 페기 구겐하임이 세운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 재단의 이사였던 라일랜즈 부부는 정신이 흐린 노년의 러지에게 접근해 호의를 얻은 뒤로 그녀가 보관 중인 파운드의 많은 유품을 빼돌려 예일 대학에 팔았다. 러지와 파운드가 낳은 딸이 사실을 안 뒤엔 이미 늦었다.

8년 전 만든 홍보 영상. 2023년 현재 17집까지 나왔다

동시대 독일의 바흐가 오랜 세월 독일 음악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것에 비하면 비발디 발굴의 역사는 채 백 년이 못 되었고, 그나마 풍파를 겪으며 여전히 많은 작품이 빛을 보길 기다리고 있다. 비발디는 20세기 후반,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마이클 잭슨과 팽팽하게 겨뤘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신곡을 쏟아내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런 바로크 음악가가 비발디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이탈리아 작곡가는 20세기 들어 그 업적이 드러났다. 걸렸던 자리를 지킨 고미술이나, 활자가 곧 작품인 문학과 달리 음악은 공기이므로 연주되기 전에는 그 가치를 알 수 없었다.

카발리의 <일 자소네>. 그리스 신화 가운데 이아손의 이야기이다.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1676)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는 비발디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베네치아에 살며 40편이 넘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1637년 베네치아에 사상 처음으로 대중을 위한 산 카시아노 극장(Teatro San Cassiano)이 문을 열었다. 왕이나 귀족이 사적으로 보는 공연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좌석을 팔아 운영하는 오늘날의 극장이다. 카발리는 문예부흥을 타고 ‘발명’된 종합예술 오페라의 폭발적 수요에 부응한 것이다. 공연되는 족족 거리를 휩쓸던 카발리의 오페라는 다음 시즌에는 다른 작품으로 대체되었다. 카발리 뒤에는 비발디가, 비발디 뒤에는 또 후배 작곡가들이 선배의 자취를 덮었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전 깡그리 잊혔던 카발리의 오페라 27편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악보는 최고의 고음악 전문가 레오나르도 가르시아 알라르콘에게 넘어갔고, 그는 베네치아 바로크 음악 센터의 후원으로 놀라운 오페라의 여명에 맹렬히 숨결을 불어넣는 중이다.

Time to say goodbye!

관광객 대부분은 이런 놀라운 발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곤돌라에 기댄 채 사공의 노래를 청한다. 괴테와 바그너가 앉았던 산 마르코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아페롤 스프리츠에 취기가 오른 사람들이 베네치아의 밤을 저 나름대로 찬양한다. 로마로 가기 전 어둑한 아드리아해를 바라본다. 베네치아는 어쩌면 창작의 사계절을 지나 새 봄을 기다리는지 모른다. 봄이 올까?

아름다운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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