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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Dec 21. 2023

향락에 감춰진 순정을 찾아

2023 이탈리아 기행 (4) - 베로나와 베네치아의 <라 트라비아타>

2024년 1월호 노블레스 매거진 게재

  

2023년으로 100주년을 맞은 베로나 아레나 축제의 마지막 날인 9월 9일 토요일. 이런 날 술이라도 없다면 멋없다. 포도 수확을 늦춰 나무에서 수분을 말려 당도를 높인 뒤 발효시킨 아마로네 와인은 베네토 지방의 특산품이다. 술은 당분을 알코올로 바꾼다. 늦여름 작열하던 태양의 숨결을 품은 듯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으로 이 와인을 좋아했던 위대한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를 떠올린다. 100년 전 태어나 1947년 이 무대를 통해 혜성과 같이 세상에 자신을 알린 그녀. 베로나는 5년 뒤인 1952년 칼라스에게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주역을 맡겼다. 61년 만인 지난해, 마지막 무대에서 안나 네트렙코가 같은 역할로 대미를 장식했다.

징녀. 코미디 빅리그 아님!

베로나 아레나의 명물 중 하나는 공연 전 울리는 징이다. 당일 무대에 설 법한 복장의 미녀가 세 차례 무대에 올라 징을 치며 막이 오를 시간이 다가옴을 알린다. 장내 안내 방송에서 출연진을 호명하기 시작한다. ‘비올레타 발레리 역에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라는 말과 함께 수천 명의 환성이 터져 나온다. 마치 복싱 경기장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왜 아니겠는가? 이곳은 고대 로마에서 검투사들이 겨루던 아레나이다. 아레나가 곧 검투사들의 피를 덮던 ‘모래’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음악 이외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세상과 피 튀기듯 투쟁하는 네트렙코이다. 좋고 싫음을 떠나 젊은 시절 예쁘장한 용모로 많은 점수를 받았던 그녀는 연륜을 더하고 체중을 불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이 얼굴이 아닌 밀도 높은 음성과 극적인 표현력에 있음을 증명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칼라스의 음성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

비올레타 발레리 - 소프라노 - 안나 네트렙코!

지난달에 보았듯이 현대적인 연출에 많은 공을 들인 탓에 찬반이 갈린 <아이다>였지만, 마지막 <라 트라비아타>는 프란코 체피렐리가 생전에 연출했던 고전적인 무대를 재연했다. 그 또한 칼라스와 동갑으로 탄생 100주년을 기렸다. 체피렐리는 멘토인 루키노 비스콘티가 영화 <무고한 존재>에서 묘사한 것처럼 파리의 향락을 아레나에 그대로 펼쳐 보였다. 광활한 무대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분은 없었고, 어느 부분을 봐도 인물의 들고남과 어우러짐은 짜임새 있었다.

넌덜머리 나는 ‘축배의 노래 ’는 이제 죽을 때까지 그만 듣고 싶다

오페라는 호흡이 긴 예술이다. 작품 길이만 두 시간이 훌쩍 넘고, 네 시간가량 되는 작품도 있기에 막간 휴식까지 하면 네다섯 시간을 보내야 함이 보통이다. 출연진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엄청난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예술이다. 대중성에 기댈 수밖에 없던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앞부분에 사활을 걸었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압도적인 액션으로 시작을 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이다>는 초반 ‘청아한 아이다’, ‘이기고 돌아오라’, ‘개선 행진곡’과 같은 곡으로 관객을 열광케 한다. 실제로 ‘개선 행진곡’이 끝나고 집에 가는 사람도 많다. <라 트라비아타>도 ‘축배의 노래’, ‘아, 그이였던가!’, ‘프로벤차 내 고향’과 같은 불멸의 히트곡으로 전반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베르디와 같은 거장이 앞부분에 힘을 다 쏟아붓고 뒷부분을 졸음과 인내심에 맡겼을까? 사실 <라 트라비아타>의 참맛은 후반부에 시작된다. 우선 앞부터 살펴보자.     

아, 이상해 ㅋㅋ (이건 너무 하이 개그네)

화류계의 꽃이던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순수한 사랑에 감동해 방탕한 생활을 접고 교외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어느 날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온다. 창부와 아들의 사랑이 딸의 결혼을 앞둔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되니 아들을 떠나달라고 무례하게 요구한다. 애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한 비올레타는 맘이 변했다는 편지만 남기고 파리로 떠난다. 속마음을 모르는 알프레도는 분노한다. 

집시, 집시, 집시, 집시 여인 끝이 없는 방황을 하네

이어지는 2막 2장의 시작은 누가 들어도 발레 음악이다. 밀라노 라 스칼라의 프리마 발레리나 비올레타 만니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집시 무희를 이끈다. 샴페인과 아마로네로 몽롱하던 아레나에 청량감이 가득 찬다.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 비올레타와 그녀에게 화가 난 알프레도가 파티장에서 마주친다. 알프레도는 창부에게 어울리는 것이라며 카드에서 딴 돈을 비올레타에게 던진다. 비올레타는 속이 타는 듯한 슬픔을 독백으로 부르며, 하객은 알프레도의 잔인함을 비난한다. 비올레타의 진심을 안 아버지마저 아들의 경솔함을 꾸짖자 그제야 알프레도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며 뉘우친다. 

알프레도, 알프레도~

이 2막의 파국이 내가 <라 트라비아타>에서 가장 숨죽이며 보는 장면이다. 진정 이 오페라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이 부분부터가 핵심임에 공감할 것이다. 심지어 평소 서곡에 별로 공을 들이지 않는 베르디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전주곡으로 뒤에 올 슬픈 사랑의 결말을 예고했다. 네트렙코, 신성으로 알프레도를 맡은 테너 프레디 데 톰마소, 라 스칼라의 베테랑으로 아버지를 열창한 루카 살시의 앙상블은 베로나의 합창과 어우러져 머리털을 쭈뼛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칼라스의 라 스칼라 공연으로 들어보자

베로나의 마지막 밤을 남은 아마로네 와인으로 보내고 이튿날은 베네치아로 향했다. 라 페니체 극장이 같은 <라 트라비아타>로 새 시즌을 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작품이 1853년 초연된 장소이다. 1792년에 문을 연 라 페니체는 1836년에 화재로 파괴된 뒤 이듬해 재개관했지만, 1996년에는 복구 불가능하게 모두 타 안타까움을 샀다. 그러나 1954년 비스콘티가 극장 내부를 꼼꼼하게 포착한 영화 <애증>을 남긴 덕에 2003년 가까스로 세 번째 불사조 극장이 문을 열었다. 이듬해 재개관 첫 작품은 당연히 <라 트라비아타>였다. 100년 된 베로나와는 또 다른 책임감이 필요한 장소이다.

겉에서 보면 이것이 오페라 극장인가 싶은 라 페니체. 베네치아 건물은 속이 깊다.

캐나다의 로버트 카슨 또한 체피렐리 못지않은 오페라 연출의 대가이다. 그는 베로나의 정통 무대와는 반대 스타일이다. 베로나의 경우 큰 무대를 채우는 것이 과제라면, 베네치아는 작은 무대를 알차게 쓰는 아이디어가 관건이다. 어쩌면 카슨에게 어느 시대의 옷을 입힐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라 트라비아라>가 본질적으로 돈과 사랑의 거래라는 문제에 뿌리박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가 시종일관 배경으로 삼은 울창한 숲에선 끊임없이 지폐가 떨어진다. 2막 2장의 파티가 열리는 무대를 보드빌 극장(극장식 카바레)으로 그린 것은 오페라 예술 자체의 풍자이다.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은 사실 ‘축배의 노래’를 부르는 파티가 아니라 여주인공이 죽은 뒤 그의 빚을 청산하려고 사치품을 경매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나는 카슨의 무대에 뿌려지는 지폐가 오페라, 라 페니체, 나아가 베네치아에 뿌려지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1천 년의 세월 동안 강소국으로 독보적인 문화를 창조했던 베네치아는 지난 세기 이래 결국 경매 시장에 나온 매물이 되고 만 것 아닐까? 매춘부였던 비올레타가 죽을 때까지 순수한 사랑을 잃지 않고 간직했다면, 베네치아가 간직한 ‘순정(純情)’은 어떤 것인가? 물의 도시를 사랑하고 많은 것을 빚진 나인만큼 남의 고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로사 페올라가 열연한 베네치아 <트라비아타>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높은 곳에 올라야 한다. 다음 날 나는 돌로미티로 향했다.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 접경을 이루는 알프스 지역이다. <핑크 팬서>, <클리프행어>와 같은 영화 촬영지로 잘 알려진 이곳의 작은 마을 코르티나 담페초는 2026년 동계 올림픽을 밀라노와 함께 유치해 벌써 들떴다. 나에게는 만년의 구스타프 말러가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던 곳으로 뜻깊다. 투명한 호수에 비친 만년설에 때 묻지 않은 ‘순정(純正)’ 베네치아가 박혀 있을까? 내가 산에서 주운 돌 이름은 ‘에즈라 파운드’, ‘안토니오 비발디’, ‘프란체스코 카발리’ 따위이다. 다음 달에 이 원석을 가공해 베네치아에 걸맞게 세팅해 보자.

관람을 마치고 늦은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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