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 복원에 힘 쓴 마에스트로들
치마로시아나, 로시니아나, 스카를라티아나, 파가니니아나, 스트라디바리오, 타르티니아나, 비발디아나, 가브리엘리아나... 햄버거나 피자 가게 이름을 늘어놓은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20세기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끈기 있는 뿌리 찾기 결과물의 제목이다.
고전을 모범으로 본다는 생각을 놓고 보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 신고전주의는 반복되어 왔다. 르네상스, 18세기 고전주의, 20세기 신고전주의가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내세웠다. 대개 양상은 예술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려워져 그들만의 언어가 되어가는 상황을 경계하며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20세기 들어 서양 음악이 200년 이상 지켜온 조성의 뿌리가 흔들렸을 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풀치넬라 Pulcinella>라는 발레 음악으로 돌파구를 연 것이 신고전주의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30여 년 동안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창작의 절정기를 이어간다. 19세기에 나온 에드바르 그리그의 <홀베르크 모음곡>이나 차이콥스키의 <스페이드 여왕> 가운데 모차르트 스타일 디베르티멘토를 신고전주의의 전조로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방에 그쳤을 뿐이고 기존 양식을 대체하는 변곡점은 아니었다.
1920년 스트라빈스키는 여러 바로크 음악을 자기 스타일로 편곡해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광대 풀치넬라를 발레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도메니코 갈로, 카를로 이그나치오 몬차, 우니코 빌헬름 반 바세나르의 곡이 부활했다.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의 곡이라고 알려졌던 노래도 사실 20세기 작곡가 알레산드로 파리소티의 위작이었다. 그러고 보면 파리소티를 스트라빈스키보다 앞선 신고전주의의 선구자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파리소티보다 훨씬 의미 있는 움직임이 이탈리아에서 싹트고 있었다.
러시아 발레단의 세르게이 댜길레프는 <풀치넬라>보다 3년 앞선 1917년에 빈첸초 토마시니(Vincenzo Tommasini, 1878-1950)에게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음악의 편곡을 주문했다.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 1707-1793)의 희극 <기분 좋은 여인들 Le donne di buon umore>를 발레로 만들기 위한 음악이었다. 로마에서 태어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나온 뒤 베를린에서 막스 브루흐에게 배우기도 한 토마시니는 스카를라티의 건반을 위한 소나타를 능숙하게 편곡해 냈다. 사실상 스트라빈스키를 위한 예시를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일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가 파리 오페라가 아니라 토마시니의 발레처럼 로마의 코스탄치 극장에서 초연되었더라면, 관객에게 그리 참신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신고전주의는 스트라빈스키와는 맥락이 달랐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발레단의 일원으로서 그들이 꽤 오랫동안 지속해 온 편집 발레의 부수 음악을 제공하는 데 원뜻이 있었다. 쇼팽의 피아노곡으로 만든 <쇼피니아나 Chopiniana>, 로시니를 편곡한 <이상한 장난감 가게 La Boutique fantasque> 따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익숙한 것이거나 낯선 것이거나 스트라빈스키에게 원재료는 자기 스타일로 맘대로 바꿔도 되는 참신한 일감에 불과했다. 레스피기도 <이상한 장난감 가게>나 러시아 민요로 <마술 주전자 La Pentola Magica>와 같은 발레를 만들 때는 스트라빈스키와 크게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주어진 소재가 자신들이 잊었던 뿌리임을 자각하게 된다.
토마시니와 같은 해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발레와 무관한 <옛 춤곡과 노래 모음곡 1번 Antiche danze ed arie per liuto. Prima suite>을 발표했다. 시모네 몰리나로, 빈첸초 갈릴레이(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이다)에 더해 16세기 무명 작곡가들의 춤곡과 노래를 간추려 현대 악기로 연주하도록 만든 선집이다.
1923년의 <옛 춤곡과 노래 모음곡 2번>은 17세기 음악가들(파브리티오 카로소, 장 바티스트 베사르, 마랭 메르센, 베르나르도 자논첼리)로 지평을 넓혔다. 특히 카로소는 르네상스 시대 춤의 대가였다. 첫 곡 ‘라우라 소아베’는 1589년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와 로렌의 왕녀 크리스티나의 결혼식을 위해 연주했던 노래를 그가 춤곡으로 다듬은 것이다. ‘대공의 무도 Ballo del Granduca’ 또는 ‘피렌체의 대기 Aria di Fiorenza’라고 불린 이 곡은 당대에만 1백 번이 넘게 편곡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거꾸로 따져서, 연대가 불분명한 수많은 편곡 가운데 어느 것이 오리지널인지 가렸을 때 현대 연구자가 느낀 희열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장 유명한 레스피기의 세 번째 모음곡은 1931년에 나왔다. 내가 21세기 최고로 꼽는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에서 일종의 주도동기로 사용되는 ‘시칠리아나’는 전곡 가운데 제일 널리 알려졌다. 류트 연주자 폴 오뎃(Paul O’Dette)은 1986년 레스피기의 편곡을 추적해 그가 택한 춤곡과 노래를 르네상스 스타일로 복원했다. 하이페리온은 적절하게 앙투안 바토가 그린 <무도회의 기쁨>을 앨범 표지로 썼다. 레스피기의 첫 편곡이 나오고 근 70년 만에 르네상스의 풍속도가 완성되었다.
레스피기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비단 세 편의 모음곡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상 그의 모든 곡이 과거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의 결과물이다. 동료들의 화답이 즉시 이뤄졌다.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는 1921년 도메니코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 1749-1801)의 다섯 피아노 소품을 가지고 쓴 교향적 단편 <치마로시아나 Cimarosiana>를, 이듬해에는 골도니의 작품에 붙인 오페라 <골도니의 세 코미디 Tre commedie goldoniane>를 발표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인이었고, 로시니에게 영향을 미친 치마로사는 <비밀결혼 Il matrimonio segreto>이라는 걸작으로 19세기 전반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곡가였다. 직전 해에 나온 마뉴엘 데 파야의 <삼각모자 El sombrero de tres picos>를 떠오르게 하는 부분도 나온다.
말리피에로와 같은 베네치아 토박이인 골도니는 풍자극으로 당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그의 희곡 가운데 <커피 가게 La bottega del caffè>, <심술궂은 테오도르 노인 Sior Todero brontolon>, <키오자의 다툼 Le baruffe chiozzotte>를 말리피에로가 무대화한 것이다. 골도니의 현대적인 웃음에 대한 말리피에로의 안목은 20세기 후속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밀라노 피콜로 극장의 거장 조르조 스트렐러(Giorgio Strehler, 1921-1997)는 <키오자의 다툼>을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었고,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였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ainer Werner Maria Fassbinder, 1945-1982)는 <커피 가게>를 각색해 부활시켰다. 비록 <골도니의 세 코미디>는 전곡이 녹음된 적이 없어 교향적 단편으로만 접할 수밖에 없지만, 말리피에로의 시도는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가 독점하는 풍속 음악의 청량감을 나눠가질 만한 것이다.
알프레도 카셀라는 일찌감치 파리로 유학 갔고, 그곳에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의 엄청난 파장을 몸소 느낀 동료였다. 그는 1926년 피아노와 소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스카를라티아나 Scarlattiana>로 80년대생(La generazione dell’ottanta)들의 복고 운동에 동참했다. ‘신포니아’, ‘미누에토’, ‘카프리치오’, ‘파스토랄레’, ‘피날레’ 다섯 악장으로 된 <스카를라티아나>에는 내가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의 DG 데뷔 앨범으로 제일 처음 접했던 K450의 G단조 소나타를 비롯해 아들 스카를라티의 5백여 곡의 소나타에서 가린 여든 개 주제가 동원되었다.
무솔리니가 본색을 드러내기 이전에 세상을 떠난 레스피기와 달리 그의 문화 정책에 편승해 승승장구한 카셀라는 1942년 관현악 디베르티멘토 <파가니니아나 Paganiniana>의 네 악장을 발표했다. 빈 필하모닉의 창단 100주년을 기념해 위촉받은 이 곡은 카를 뵘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일부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무반주 카프리스 따위로만 알려졌던 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실제로 방대한 작품의 창작자였음을 보여주는 시도였다(파가니니의 전집은 CD로 마흔 장 분량이다). 첫 악장은 무반주 카프리스의 몇몇 주제로부터 가져왔고, 두 번째 악장은 기타 사중주(기타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6번의 마지막 악장을 편곡한 것이다. 3악장 ‘로망스’는 단악장 바이올린 협주곡인 <프리마베라 소나타>의 ‘라르게토 칸타빌레 아모로소’ 주제이며, ‘타란텔라’의 피날레는 다시 기타 사중주 4번의 끝 악장에서 주제를 빌려왔다. 잊힌 파가니니를 되살린 의미는 있었지만, 그는 카셀라의 20세기와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발굴이 아닌 먼지를 털어내는 수준에 그쳤다.
반면 말리피에로는 1948년 <스트라디바리오 Stradivario>와 1952년 <비발디아나 Vivaldiana>로 고향 베네치아의 전성기를 회고했다. <스트라디바리오>는 15분짜리 발레이다. 작곡 당시 말리피에로는 모교 베네치아 음악원의 학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마침 학교에 떠돈 괴담, 곧 밤이면 음악원에 전시된 악기들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가 다음과 같은 줄거리에 영감을 주었다.
늙은 악기상이 가난한 거리의 악사에게 값진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빼앗는다. 주인 잃은 바이올린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고요한 밤이 오자 악기들이 살아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플루트에 이어, 드럼, 호른, 트롬본과 튜바, 현악기, 오보에, 마지막으로 캐스터네츠가 가세해 화려한 ‘스파뇰레스카’를 연주한다. 거리의 악사가 돌아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되찾고 악기들을 이끈다. 놀라서 잠을 깬 늙은 악기상은 공격받고 죽는다.
말리피에로 권위자 존 워터하우스(John Waterhouse, 1939-1998)의 지적처럼 <스트라디바리오>는 실제 무대에선 홀대받아 왔으나 디즈니의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내용이다. 이 곡의 유일한 음반(크리스티안 벤다가 지휘하는 스비체라 이탈리아나 오케스트라) 해설을 쓴 데이비드 갤러거(David Gallagher)는 러시아 발레단의 댜길레프를 늙은 악기상에 비유한다. 원래 댜길레프에게 <치마로시아나>를 위촉받은 레스피기가 결과에 이르지 못하자, 안무가 레오니드 마신이 말리피에로에게 부탁했다. 마신이 자기 생각을 훔쳤다고 생각한 댜길레프는 악보를 빼앗아 공연하면서 말리피에로의 이름은 싣지 않았다. 댜길레프는 1929년 베네치아에서 객사했다.
‘오탄타’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루이지 달라피콜라(Luigi Dallapiccola, 1904-1975)는 1951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타르티니아나 Tartiniana>로 뿌리 찾기를 이어갔다. 1956년에는 <타르티니아나 2번>이 나왔고, 이듬해에는 그것을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해 편곡했다. 그러나 달라피콜라의 작업은 이전 세대와는 사뭇 달랐다. 아니 달라야 했다. 선배들의 이탈리아는 겨우 통일을 이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극심한 이념 분쟁과 빈부 격차로 사분오열 지경이었다. 위대한 건축물이 무너지고 수많은 미술이 국외로 유출되었지만 그래도 과거의 영광을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면, 폐허가 된 도서관에서 먼지 쌓인 악보로 잠자던 음악의 유산은 그것을 지은 사람의 이름조차 희미해져 갔다. 그들에게 고음악은 실체가 불분명한 ‘향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카셀라가 비발디를, 말리피에로가 몬테베르디를 다시 살려내 정리한 덕분에 후배 말리피에로는 실체를 접한 세대가 되었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당대 방식으로 들려줄 것인가는 연주자들의 몫이었다. 달라피콜라의 경쟁자는 연주자가 아니라 여전히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로 대표되는 창조자들이었다. 스트라빈스키가 재미 삼아 과거의 유산을 가지고 놀아봤는지는 몰라도 그 결과는 계시적이었다. 의도했건 아니건 낭만주의와 단절을 선고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달라피콜라의 <타르티니아나>는 주세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의 재료를 가져왔을 뿐, 그것을 바로크 방식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는 타르티니와 같은 이스트리아(크로아티아 북부) 태생이었다.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축에 선 이유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그는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이탈리아인이었다는 점에서 또 한 사람의 선배 페루초 부소니(Feruccio Busoni, 1866-1924)와 맞닿아 있었다. <타르티니아나>는 타르티니의 소재를 부소니식으로 다룬 음악이었다. 바이올린이 자취를 감추고 목관이 오르간 대위법과 같은 카논을 들려주기도 한다.
말리피에로는 달라피콜라가 첫 번째 <타르티니아나>를 낸 이듬해인 1952년 <비발디아나 Vivaldiana>를, 생애 막바지인 1971년 <가브리엘리나 Gabrielina>를 썼다. 두 선구자가 아직 베일에 싸였을 당시엔 몰라도 이제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곡이 되었다. 말리피에로의 제자였던 브루노 마데르나(Bruno Maderna, 1920-1973)도 1952년 <프레스코발디의 세 소품 Frescobaldi: Tre Pezzi> 편곡, <팔레스트리나 협주곡 Palestrina-Konzert>으로 알려진 바세나르 작품의 편곡, 로도비코 비아다나(Lodovico Viadana, 1560-1627)의 <신포니에 무지칼리 Sinfonie Musicali> 가운데 다섯 개 편곡을 더했다. 스승보다 38세 어리지만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마데르나는 마지막 해에 가브리엘리의 <3성 합창 칸초네 Canzone a tre cori>를 편곡했지만, 역시 말리피에로처럼 고지식하게 들린다. 달라피콜라의 고민 이후로 신고전주의는 더 이상 ‘새로운’ 양식이 아니었다.
1917
Respighi: Antiche danze ed arie per liuto. Prima suite (secoli XVI-XVII), per orchestra P 109
1921
Respighi: Concerto gregoriano per violino e orchestra P 135
1921
Malipiero: Cimarosiana, cinque frammenti sinfonici da pezzi pianistici di Cimarosa
1922
Malipiero: Tre commedie goldoniane
1923
Respighi: Antiche danze e arie per liuto. Seconda suite (secoli XVI-XVII) P 138
1925
Respighi: Rossiniana, suite per orchestra da Les riens di Rossini P 148
1926
Casella: Scarlattiana per pianoforte e piccola orchestra, op. 44
1931
Respighi: Antiche danze ed arie per liuto. Terza suite (secoli XVI-XVII)
1931
Casella: Quartetto per archi n.3 "Cantari alla madrigalesca"
1942
Casella: Paganiniana, divertimento per orchestra op.65
1948
Malipiero: Stradivario
1951
Dallapiccola: Tartiniana per violino e pianoforte
1952
Malipiero: Vivaldiana
Maderna: Fescobaldi Tre pezzi; Palestrina Konzert; Viadana Le sinfonie
1956
Dallapiccola: Tartiniana seconda per violino e pianoforte
1957
Dallapiccola: Tartiniana seconda o "Tartiniana II" per violino e orchestra
1960
Mallipiero: Sette canzonette veneziane for voice and piano
1961
Mallipiero: Serenissima, sette canzonette veneziane per sassofono concertante e orchestra in tre movimenti
1971
Mallipiero: Gabrieliana
1972
Maderna: Gabrieli Canzone e tre c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