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기행 (5) 티볼리와 트라스테베레에서 본 황제와 교황의 로마
노블레스 매거진 2024년 3월호 내용 증보
이탈리아 유미주의 문학의 대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863-1938)는 소설 『쾌락 Il piacere』에서 주인공의 취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가 사랑한 로마는 황제들의 로마가 아니라 교황들의 로마였고, 아치들과 고대 대중목욕탕이나 포로 로마노의 로마가 아니라 빌라와 분수와 교회의 로마였다. (...) 폐허로 남은 고대 황제들의 장대함보다 콜론나 가문과 도리아 가문, 바르베리니 가문의 귀족적인 화려함에 매료되었다.”
부연하자면 콜로세움보다는 바티칸이, 폐허의 유적보다는 보르게세 미술관이 더 좋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에겐 같은 옛것이고 굳이 우열을 가릴 것 있겠냐마는 실은 예술적 취향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 쪽이냐, 르네상스와 바로크 쪽이냐로 나누는 것이다. 나는 로마에서 보낸 어느 하루를 단눈치오식으로 구분해 보았다.
아침 일찍 티볼리로 향했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차로 3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근교이다. 기원전 13세기 로마 이전부터 삶의 터전이던 이곳은 아름다운 경관과 좋은 수원(水源) 덕분에 로마 시대 황제와 귀족의 별장 터가 되었다. 오현제(五賢帝) 가운데 세 번째인 하드리아누스 황제(Hadrianus, 서기 76-138)의 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가 대표적이다. 빌라라고는 하지만 별장이나 별궁을 넘어 폼페이 전체보다 넓은 규모이다.
제국의 팽창을 잠시 중단하고 안정화에 힘 쏟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이전의 그리스나 이집트의 앞선 문명을 높이 사 점령지 유산을 빌라에 재현했다. 나일강 하구 도시 이름인 카노푸스(Canopus)나 그리스 아고라에서 유래한 페칠레(Pecile), 로마 고유의 자랑인 거대한 욕장(Terme)은 뼈대만 남았음에도 감탄을 불러왔다. 목욕하며 지중해를 경영하는 천리안의 황제였던 셈이다. 증기가 빠져나가도록 욕장 천장에 뚫은 구멍은 하드리아누스가 로마에 지은 판테온을 떠오르게 했다. 황제는 죽기 전에 자신의 영묘(靈廟)를 세우라 명했고, 교황은 그 명당에 뒷날 산탄젤로성을 지었다. 바로 푸치니 <토스카> 3막의 무대이다.
티볼리는 황제만의 공간이 아니다. 교황 시대 귀족도 이곳에 빌라를 지었다. 그중 으뜸은 에스테 집안의 이폴리토(Ippolito d’Este, 1509-1572) 추기경이 지은 빌라 데스테(Villa d’Este)이다. 페라라의 데스테 집안은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다. 이폴리토의 할아버지 에르콜레 1세는 음악을 중시해 조스캥 데프레를 초빙했다. <페라라 에르콜레 공작 미사 Missa Hercules Dux Ferrariae>가 그에게 헌정된 것이다.
그의 아들 알폰소 1세는 티치아노를 후원한 미술 애호가였다. 그의 아내는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딸이자 세기의 경국지색으로 숱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루크레치아 보르자였다. 이런 가풍을 이어받은 이폴리토의 곁에는 교황청의 음악을 책임지는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가 있었다. 추기경은 역시 교황청 건축가인 피로 리고리오(Pirro Ligorio)에게 빌라 데스테의 건축을 맡겼다. 고대 로마를 깊이 숭상한 리고리오에게 폐허로 남은 빌라 아드리아나는 본받을 위대한 유산이었다. 다만 원상회복이 아닌 그 재료를 재활용해 빌라 데스테를 지은 탓에 빌라 아드리아나는 더욱 앙상해질 수밖에 없었다.
빌라 아드리아나의 잔재에선 옛 모습을 상상하는 데에 그쳤지만, 빌라 데스테의 화려함과 웅장함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안을 장식했던 값진 미술품은 프레스코로만 짐작할 수 있다. 또 그 대기를 감쌌던 놀라운 음악은 하루 두 번 분수가 가동될 때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로만 겨우 귀를 간질인다. 내 일은 공간을 채운 음악을 찾는 것이다. 고대 빌라 아드리아나의 음악은 요원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빌라 데스테의 사운드트랙은 우리 귀까지 거의 와 있다. 일단 로마로 돌아간다.
메디치 가문의 첫 군주 코시모 1세의 아들 페르디난도(Ferdinando I de' Medici, 1549-1609)도 이폴리토 데스테 추기경처럼 둘째 아들이었기에 성직자의 길을 갔다. 불과 13세에 추기경이 되어 로마로 보내진 페르디난도도 이폴리토 못지않은 예술 안목의 소유자였다. 핀초 언덕에 자리한 고대 건물이 그의 눈에 들었다. 역시 고대로부터 명당이었던 자리에 서기 2세기 무렵 빌라 아드리아나를 모방한 아름다운 궁전이 들어섰다.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고 풍파를 겪었지만 1576년 페르디난도 추기경이 매입한 뒤로 빌라 메디치라 불렸다. 전면의 아름다운 부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선을 기념해 고대에 만든 평화의 제단(Ara Pacis)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추기경은 고향 피렌체에서 바르톨로메오 암만난티(Bartolomeo Ammannati)와 야코포 추키(Jacopo Zucchi)를 불러 빌라를 새로 꾸몄다. 개인 서재인 스투디올라는 새장처럼 지었고, 천장에 자연을 끌어왔다. 그 자체로 박물지(博物志)였다.
1587년 피렌체 군주이던 형의 급서로 페르디난도 추기경이 소환되어 38세 나이로 뒤를 이었다. 후손을 얻기 위해 늦은 결혼도 해야 했다. 그의 짝은 오래전 프랑스로 시집을 간 여걸 카트린 드 메디치의 손녀인 로렌의 크리스티나(Christine de Lorraine)였다. 1589년 피렌체 피티 궁전에서 열린 결혼식은 예술사에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로마에서 데려간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Emilio de’ Cavallieri)를 비롯한 당대 으뜸의 작곡가들이 <순례의 여인 La Pellegrina>을 공동 창작해 결혼을 축하했으니, 이로부터 오페라라는 종합 예술의 문이 활짝 열렸다. 피로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 ‘오, 이 얼마나 새로운 기적인가’(O che nuovo miracolo)는 ‘대공의 무도회’(Ballo del Granduca) 또는 ‘피렌체의 선율’(Aria di Fiorenza)이라는 이름으로 편곡되며 널리 퍼졌다.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는 <옛 춤곡과 노래 Antiche arie e danze> 모음곡 2번의 첫 곡에서 바로 그 선율, 공기를 현대풍으로 편곡했다.
추기경이 떠난 뒤 빌라의 많은 조각이 피렌체로 옮겨지면서 모사품으로 대체되었지만, 그 안을 감돌던 대기까지 가져가지는 못했다. 역시 레스피기는 <로마의 분수 Fontana di Roma> 가운데 마지막 곡으로 ‘해 질 녘 메디치 빌라의 분수 La fontana di villa Medici al tramonto’를 그려냈다.
메디치 빌라에서 얼마 안 가 영화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로 유명한 스페인 광장이 나온다.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두 갈래 길 사이로 보기 드문 생김새의 건물이 보인다. 바로 로마를 황제와 교황의 도시로 양단했던 단눈치오가 살던 팔라초 추카리(Palazzo Zucchari)이다. 저승을 지키는 신 오르쿠스가 입을 벌린 모양의 입구가 인상적인 이 건물은 현재 막스 플랑크 연구소 산하 헤르치아나 도서관 건물로 사용된다. 해가 자니콜로 언덕 너머로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서울의 홍대 앞처럼 젊은 인파가 몰리는(물론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소박하지만) 트라스테베레 구역으로 간다. 팔라초 리아리오 궁전과 그 정원(현재 로마 식물원)은 17세기 크리스티나 여왕(Drottning Kristina, 1626-1689)이 머물던 곳이다. 신교 국가 스웨덴의 왕위를 박차고 교황의 로마로 건너온 여왕은 아카데미아를 열어 음악을 후원했다. 교회 안에서 ‘거룩한 찬양’과 ‘악마의 유혹’이라는 갑론을박 탓에 뜨거운 감자였던 음악은 새로운 시대를 맞아 교회 밖에서 만개했다. 오페라는 물론 기악의 융성으로 말미암아 바로크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Alessandro Stradella),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가 그녀의 수혜를 입은 음악가였다.
인근 산타 체칠리아 대성당(Basilica di Santa Cecilia in Trastevere)의 수녀들이 막 저녁 기도를 시작할 때라 어둑하던 교회를 따스한 불빛이 감싼다. 3세기 무렵 순교한 체칠리아는 음악의 성녀이다. 고즈넉한 오르간이 연주되는 가운데 천장에는 세바스티아노 콘카의 <성 체칠리아의 대관식>이 이 교회의 내력을 담아낸다.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승천한 체칠리아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 아래로 오르간이 그려져 있다. 많은 음악이 그녀를 찬양하지만, 그 가운데 그녀의 시신이 안장된 이 교회에 봉헌되어 초연된 곡이 있다. 1720년에 작곡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성 체칠리아 미사>이다.
스카를라티는 이미 1708년 사순절 기간 로마에서 피에트로 오토보니 추기경을 위해 <성 체칠리아의 순교 Il martirio di Santa Cecilia>를 썼다. 원래 <황금 전설>이 전하는 체칠리아 성녀의 이야기는 그녀가 정혼자였던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동생에게 전교하는 과정과 알마키우스 총독의 모진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내며 순교한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오토보니 추기경이 직접 쓴 대본에서 발레리아누스 형제는 이미 처형되어 등장하지 않고, 알마키우스 총독이 체칠리아에게 구애하는 당사자로 나온다. 총독은 그녀가 신앙을 드러내지 않고 맘속으로만 간직하면 자신도 개종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도 박해하지 않겠다고 회유하지만 체칠리아는 신앙을 감춰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신랑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다. 알마키우스와 체칠리아 사이를 오가며 중재하던 고문(顧問)과 체칠리아의 충실한 유모도 그녀의 완고함을 돌리지 못한다. 결국 황제가 직권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형리가 참형을 세 번 집행하지만, 그녀는 목이 잘리지 않는다(원전에 따르면 사흘 동안 살아서 유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알마키오는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몰락을 미리 보고, 고문과 유모는 체칠리아의 믿음을 애오라지 인정한다.
스카를라티의 오라토리오에서 남성은 테너인 고문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소프라노 또는 알토(카운터테너)이다. 같은 시기 부활절 마지막 상연작으로 <부활 La Resurrezione>을 선보인 젊은 헨델도 스카를라티의 작품 연주를 참관했다. 그가 향후 런던에서 쓸 오라토리오들의 씨앗은 여기서 배양되었을 것이다.
1720년, 만년의 스카를라티는 나폴리 왕국에 살았다. 그에게 <성 체칠리아 미사>를 위촉한 사람은 로마 주재 스페인 대사였던 프란체스코 아콰비바(Francesco Acquaviva)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팔라초 디 스파냐에 살며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을 책임졌다. 그가 위촉한 미사는 스카를라티에게도 교회음악의 이력을 결산하는 좋은 이정표였다. 그의 오페라를 연상케 하는 성악의 기교는 나폴리의 후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가 쓸 <스타바트 마테르>를 예고했다. <성 체칠리아 미사>의 백미는 ‘사도신경 Credo’의 마지막 구절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Et vitam venturi’이다. 장대하게 쌓아 올리는 푸가의 건축은 역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B단조 대미사>의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 Dona nobis Pacem’이 무엇을 참고했는지 알아차리게 한다.
스카를라티는 <성 체칠리아 미사>와 더불어 <성 체칠리아 저녁 기도 Il Vespero di Santa Cecilia>를 함께 썼다. 몬테베르디의 <동정녀 마리아 저녁 기도 Vespro della Beata Vergine>부터 비롯된 예배음악 궁극의 제단에 한 획을 더한 것이다. 2시간이 넘는 저녁 기도 동안 여섯 개 시편송과 마니피카트, 사이사이 응송과 후속가는 어느 세속음악보다 가시적으로 천국을 향한 신앙인의 바람을 그려냈다.
그러나 내가 트라스테베레에서 들은 수녀들의 예배는 말할 수 없이 간소했다. 3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교회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미 120년 전인 1903년 11월 22일 성 체칠리아 축일에 교황 비오 10세는 자의 교서를 발표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교회음악은 완전히 오페라화되었고 <노르마>의 ‘정결한 여신’, <람메르모르의 루치아>의 육중창, <리골레토>의 사중창 따위에 라틴어 가사를 붙여 예배에 쓰는 일이 흔했다.
음악이 원래 그 가사를 전달하려고 쓴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불경한 내용을 떠오르게 하는 부작용이 더 컸다. 비오 10세는 바로크 시대 이후 가속화된 교회음악의 세속화에 제동을 걸고 팔레스트리나 이전으로 돌아가겠다고 명시한 것이다. 오르간 이외 대부분의 악기는 배제되었고, 여성 성악가 대신 소년 성가대만 허용했다. 벨기에에서는 이 교서를 ‘죽음의 문자’라고 불렀고, 프랑스의 카미유 생상스도 반대에 앞장섰지만, 찻잔의 태풍에 불과했다. 비오 10세의 선포 100년 뒤인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교회의 입장이 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부수음악이 예배의 본질을 흔드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 신앙을 지키려고 약혼자에게 자신의 동정을 범하지 말아 달라고까지 요청한 체칠리아와 그에 순응하고 나아가 죽음까지 피하지 않은 발레리아누스의 이야기가 오늘날 포교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트라스테베레 너머 자니콜로 언덕에 달이 떠올랐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산들바람과 달빛이 서로 애무한다. 이 또한 레스피기가 <로마의 소나무 Pini di Roma> 가운데 ‘자니콜로의 소나무 I pini del Gianicolo’에서 묘사한 광경이다. 레스피기의 지시대로 삽입된 ‘녹음된 새소리’가 빌라 메디치 스투디올라의 천장을 장식했던 박물지를 살아나게 할 것만 같다.
나는 황제와 교황의 로마, 어느 한쪽만 택할 수 없다. 황제의 로마의 갈비뼈로 만든 것이 교황의 로마이며, 그 살과 피를 이루는 것이 지속해서 영향을 미친 미술과 음악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술은 다른 곳으로 떼어가면 그만이지만, 그 공기를 채웠던 음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들을 사람을 기다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