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기행 (6) 황금 사과를 손에 쥔 헤라클레스
2024년 3월호 노블레스 증보
로마 기행문에서 썼던 황제의 도시, 교황의 도시라는 구분은 나폴리에서도 유효하다. 나폴리는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으로 대표되는 고대 문화의 중심지인 동시에 부르봉 왕가의 카세르타 궁전(Reggia di Caserta)과 파르네세 컬렉션(Farnese Collection)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저분한 골목길과 언덕배기 빈민가 사이사이에 죄짓고 나폴리로 도피해 왔던 카라바조의 그림 속 군상들이 아직 살아 있는 듯이 느껴진다. 심지어 나폴리에는 마라도나를 성인처럼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감독하고 아내 잉그리드 버그먼과 조지 샌더스가 주연한 <이탈리아 여행 Journey to Italy, 1954>은 현대판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같은 영화이다. 영국 상류층 부부가 ‘호머’(Homer) 삼촌의 유산을 정리하려고 나폴리에 도착한다. 현대적인 이들 부부에게 게으르고 낙후한 나폴리는 못마땅한 일로 가득하다. 아내 캐서린은 현지인의 안내로 쿠마(Cuma)의 유적지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폼페이 발굴지 등을 돌아본다. 그녀는 여자들과 시시덕거리는 남편의 자유분방함이 거슬리고 남편은 낭만에 젖어 현실적이지 못한 아내가 마뜩잖다. 권태기의 부부는 이혼을 결심한 채 폼페이의 발굴지로 향한다. 용암에 덮였던 시신이 풍화된 자리에 석고를 부어 복원하자 손을 잡고 최후를 맞은 연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캐서린은 감정이 북받쳐 자리를 떠난다. 남편은 이혼을 망설이는 아내를 다그친다. 마침 시내의 성모 축일 행렬에 떠밀려 떨어졌다가 겨우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화해하고 질문한다. “왜 사랑하면서 자꾸 다투는 것일까”라고.
나는 여러 차례의 나폴리 기행 끝에 마침내 쿠마에 도착했다. 나폴리 시내에서 20㎞가량 떨어진 해안 유적지이다. 트로이 멸망 뒤 왕자 아이네이아스는 유민을 이끌고 지중해를 떠돌다가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에 도착한다. 그는 사랑을 맹세한 여왕 디도를 버리고 로마를 건국하라는 신탁에 따른다. 시칠리아에 머무르며 때를 기다리던 아이네이아스는 쿠마의 무녀(巫女)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무녀는 아폴론의 총애를 받아 모래알처럼 많은 생명을 얻은 700세 노파이다. 그녀의 조언대로 저승의 여왕 프로세르피나에게 줄 선물로 황금가지(겨우살이)를 꺾어 하계(下界)에 도착한 아이네이아스는 연인을 잃은 슬픔에 자결한 디도를 만난다. 디도의 원망이 돌이킬 수 없는 저주가 되었음을 안 아이네아스는 뒤돌아 아버지 안키세스를 찾는다. 안키세스는 아들에게 로마의 미래를 예고하며 개국의 뜻을 북돋는다.
20세기 영시(英詩)의 바이블로 꼽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 The Waste Land>는 쿠마의 무녀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쪼그라든 노파를 병 속에 넣고 소원이 뭐냐며 조롱하자, 무녀는 “죽고 싶다”라고 말한다. 모래알처럼 많은 생명과 함께 젊음은 청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비극이다. 엘리엇은 이를 목적의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 비했다. 쿠마 고고학 공원의 입구를 지나 무녀의 동굴 앞에 섰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s> 구절이 적혀 있다.
거대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러 개 어두운 통로가 사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바닥에도 검은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아래로 이어진 통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심연으로 뻗어 있었다. 거대한 쿠마 산 전체가 동굴로 이어진 게 분명했다.
나는 2천 년 전 안내자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으로 1만 년 전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그야말로 리하르트 바그너가 <파르지팔 Parsifal>에서 말한 “시간이 곧 공간인 곳” 아닌가! 다양한 토층의 해안 지형을 지나 무녀의 공간 앞에 섰다. 한길 정도 너비의 긴 동굴은 마치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열쇠 구멍처럼 보였다. 잉그리드 버그먼은 이곳에서 요절한 시인 친구의 시구를 떠올린다.
영혼의 사원. 더 이상 육체는 없다
순수한 금욕의 이미지만 있을 뿐
터널을 나와 아폴론 사원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도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의 구절을 만난다. 크레타의 미노스 왕을 위해 미궁을 지은 다이달로스. 미궁의 탈출 방법을 누설한 죄로 탑에 갇힌 다이달로스는 아들과 함께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 이때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간 아들 이카로스는 추락해 바다에 빠져 죽고, 다이달로스는 쿠마에 도착해 이 신전을 지었다. 멀리 이스키아섬이 바라보이는 해안에 정체 모를 말과 마차가 달린다. 어쩌면 브뤼헐의 그림 속 이카로스의 시신을 건진 것인지도!
한 단계 더 위의 주피터 신전까지 올라갔다. 나는 그곳에서 뜻밖의 길동무를 만났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온 볼프강 리히터는 초로의 모험가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저널의 편집자이자 고고학에 관심 많은 여행자이다. 1년의 절반은 독일에서 지내고, 나머지 절반은 대부분 지중해 지역에 간다고 한다. 우린 사는 환경도, 관심사도, 취향도 달랐지만, 쿠마라는 시공을 초월한 장소가 주는 친화력으로 금방 친구가 되었다. 볼프강의 부추김 덕분에 나는 예정에 없던 바이아(Baia)까지 함께 갔다.
화산 활동이 활발해 온천지로 유명했던 이곳은 카이사르에서 네로에 이르는 로마 통치자들의 휴양지로도 인기 높았다. 디아나 여신과 헤르메스의 신전이 해변을 바라보는 명당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보물들은 대부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나 멀리 루브르 박물관까지 옮겨졌다. 천장에서 바닥으로 거꾸로 자란 이름 모를 나무가 시간을 거슬러 온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천장에 구멍이 난 방은 수증기를 빼내는 욕장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작은 거북이가 사람을 피해 물속으로 들어간다. 해안선 따라 멀리 보이는 16세기 아라곤 왕 알폰소의 성을 보고 나는 이곳이 쿠마의 무녀가 아폴론에게 소원을 빌던 자리임을 알아보았다.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걸린 윌리엄 터너의 그림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은 영화 <이탈리아 여행>에서 캐서린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이다. 에르콜라노와 폼페이에서 출토한 보물이 많지만, 관람객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로마에서 옮겨온 파르네세 가문의 소장품이다. ‘르네상스의 마지막 교황’이라 칭하는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추기경 시절부터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다. 그의 조카 알레산드로의 수집품까지 더해져 수장고는 더욱 방대해졌지만, 파르네세 가문은 18세기 파르마 공작 안토니오가 죽으면서 대가 끊겼다. 수집품은 나폴리의 펠리페 5세와 결혼한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에 의해 그의 아들 카를로스 3세가 물려받았다. 카를로스 3세는 교황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마 파르네세 궁전(<토스카> 2막의 무대인 이곳은 현재 프랑스 대사관이다)의 보물을 나폴리로 옮겼다.
그중에서도 카라칼라 욕장에서 발견된 <휴식을 취하는 헤라클레스>와 <파르네세의 황소>는 박물관의 상징과도 같다. 열두 과업을 수행하던 중 휴식을 취하는 헤라클레스의 상은 원래 그리스 시대 청동이던 것을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이다. 로마의 파르네세 궁전과 피렌체 피티 궁전뿐만 아니라 나폴리 지하철역에도 복제품이 서 있을 정도로 모범적이다.
네메아의 사자 가죽이 걸린 기둥에 기댄 헤라클레스는 뒷짐 진 손에 황금사과 셋을 쥐고 있다. 거대한 그의 손아귀에 들린 사과 세 알은 마치 호두만큼 작다.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캐서린은 호머 삼촌의 친구들에게 나폴리 사람만 참뜻을 안다는 말을 배운다. “돌체 파르 니엔테 Dolce far niente!”는 직역하면 “무위(無爲)는 달콤하구나!”라는 뜻이다. 밖에서 보기에 게을러 보이는 나폴리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사실은 느림의 미학을 예찬하며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요즘의 시각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멍 때리는 헤라클레스’가 가장 어울리는 곳이야말로 이곳 나폴리인 셈이다. 그에 비하면 <파르네세의 황소>는 금방이라도 단 위에서 뛰어 내려올 듯이 역동적이다. 두 쌍둥이는 자신들의 어머니를 학대한 디르케(형제의 종조모이다)를 황소 뿔에 매다는 중이다.
대개의 나폴리 관광객은 낙후한 시내와 불안해 보이는 치안에 선입견을 품었다가 폼페이의 장구한 경관과 알록달록한 아말피 해변을 그나마 위로 삼아 돌아간다.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을 얘기하자 서울의 나폴리 친구 수잔나가 꼭 가보길 권한 곳은 카세르타이다. 카세르타 현에는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그녀의 할아버지 로베르토 스트로폴리니(Roberto Stroffolini)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나폴리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카세르타의 궁전은 과연 놀라웠다. 베르사유, 쇤브룬을 비롯해 많은 유럽 궁전을 가보았지만 이곳은 정말 특별했다. 카를로스 7세의 건축가 루이지 반비텔리는 베르사유와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등을 참고해 아름다운 궁전을 설계했다. 유네스코가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바로크 예술의 백조의 노래’, 곧 결정판이라고 평했을 정도이다.
나폴리 왕국의 궁전이 아름다운 해안 경관을 버리고 한참 내륙으로 들어온 18세기 중엽은 절대왕정의 막바지였다. 왕실의 권위를 새로 새우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임과 동시에 혹시 있을지 모를 프랑스나 영국 해군의 함포 공격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카를로스 7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도 4세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딸이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였던 마리아 카롤리나였다. 왕비는 영국 영사 해밀턴 공이 느지막이 얻은 아내 에마 하트를 가까이 두었다.
에마는 당대 유행을 주도하는 절세의 미인이었다. 에마는 마침 나폴리에 입항하려는 넬슨 제독을 만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에마는 넬슨이 나폴리에 주둔하면 나폴레옹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다고 왕비를 설득했다. 넬슨과 에마는 세기의 연인이 된다. 20세기말 조지 루커스 감독은 카세르타에서 <스타워즈>의 속편을 시작했다.
나부 행성의 아미달라 여왕(내털리 포트먼)은 제다이 기사단의 도움으로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넬슨으로 나폴레옹을 막은 데서 영감을 받은 것처럼! 그 뒤로 카세르타는 <미션 임파서블>, <다빈치 코드> 따위의 영화 촬영지로 애용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눈을 뗄 수 없이 늘어진 방을 따라가다 보면 제일 끝에 프레세페(Presepe)의 방이 나온다. ‘구유’라는 뜻의 프레세페는 성탄절의 정경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형물을 말한다. 나폴리 장인들의 프레세페는 특히 유명했다. 보티첼리가 그린 <그리스도 탄생>의 등장인물이 메디치 가문이듯이 카세르타의 말구유를 경배하는 이들은 나폴리 왕실이다.
카세르타 궁전 내부도 대단하지만 더한 압권은 셔틀버스로도 20분을 가야 끝에 이르는 정원이다. 야트막한 경사 끝에 파올로 페르시코(Paolo Persico, 1729-1796)가 만든 ‘디아나와 악타이온 분수 Fontana di Diana e Atteone’가 당당한 풍모로 시선을 끈다. 사냥 중 여신의 샘에 온 악타이온, 디아나 여신은 자신의 목욕하는 모습을 본 그를 사슴으로 변신시키고, 악타이온의 사냥개가 그를 물어 죽인다. 옆으로 난 비밀의 정원에는 아름드리 조경과 신비로운 은신처가 신화의 세계는 끝나지 않았다고 초대하는 듯하다.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잿더미에 묻힌 폼페이는 1592년 수로 공사로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당시 기술로는 발굴이 어려웠기에 도굴꾼만 들끓었다. 1748년 부르봉 왕가의 발굴 때나 이후 나폴레옹 점령기에도 귀중품만 쓸어가는 식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25년 조반니 파치니(Giovanni Pacini)가 오페라 <폼페이 최후의 날 L’ultimo giorno di Pompei>을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했다. 요즘으로 치면 엄청난 제작비용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나 다름없었다. 번개, 화산재, 구름을 묘사하는 막이 아홉 개나 동원되었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모습에 바닥층 관객이 겁을 먹었을 정도였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빈의 케른트너토어, 리스본 사웅카를로스, 파리 테아트르 이탈리앙, 베네치아 라 페니체에서 앞다퉈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정도였다.
1833년 러시아의 카를 브률로프(Karl Bryullov)가 오페라의 영감을 받은 그림을 그렸고, 다시 그림에 영감을 받은 에드워드 불워 리턴(Edward Bulwer-Lytton)이 동명 소설을 쓰면서 고대 도시의 마지막 모습이 예술로 완성을 보았다.
1863년 통일 이탈리아의 주도로 주세페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가 발굴을 책임졌다. 그가 바로 화산재층의 공간에 석고를 주입해 희생자의 모습을 복원하는 기술을 적용한 사람이다. 시가지를 잇는 도로와 화려했을 건물이 폼페이의 규모를 상상하게 했지만, 여전히 가장 감동적인 것은 생명의 흔적이다. 여기저기 햇볕을 쬐며 쉬는 개들은 마치 살아 있는 화석처럼 보였다.
마구간에 묶인 채 발견된 마소, 도망치다 잡힌 노예, 두 손을 꼭 잡은 남녀는 그 자체로 드라마이다. 폼페이 유적을 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에 반원형 극장을 지난다. 2017년 이곳에서 역사적인 공연이 열렸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를 초연과 같은 레오니드 마신(Léonide Massine)의 안무와 파블로 피카소의 미술로 재연한 것이다. 레오니드의 아들 로르카 마신이 로마 발레단을 이끌고 감독했다.
1920년대에 작곡된 <풀치넬라>는 이른바 신고전주의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스트라빈스키는 원료가 된 바로크 음악의 뼈대에 감각적인 편곡으로 살을 붙이고 피가 돌게 했다. 고고학자들이 폼페이 희생자를 석고로 되살렸듯이 스트라빈스키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시대의 광대를 깨워냈다. 그로 인해 지나간 모든 시대의 음악이 재생의 재료로 쓰일 시대가 밝았다. <풀치넬라>를 통해 고대, 근세, 현대가 일순간 하나 되었던 극장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다. ‘돌아오리라, 나폴리로 Tornerò a Napo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