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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Apr 11. 2024

이상한 장난감 가게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발레

20세기 초 서유럽에 진출한 세르게이 댜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은 선풍적인 반응을 몰고 왔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는 원래 발레 음악이 아니었지만, 바슬라프 니진스키, 타마라 카르사비나 같은 무용수와 더불어 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악이 되었다. 서른 즈음의 무명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또한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3부작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와 더불어 뒷날을 예고하는 의미심장한 작품이 1909년에 공연된 <공기의 정령 Les sylphides>이다. 댜길레프는 원래 알렉산데르 글라주노프가 편곡한 쇼팽의 피아노곡에 맞춰 안무했던 <쇼피니아나 Chopiniana>에 몇 곡을 추가했다. 이렇게 선보인 <공기의 정령>은 줄거리 없는 배경음악으로 된 추상 무용이었다.

     

1. ‘군대’ 폴로네즈 A장조, Op. 40, No. 1

2. 야상곡 A♭장조, Op. 32, No. 2

3. 왈츠 G♭장조, Op. 70, No. 1

4. 마주르카 D장조, Op. 33, No. 2

5. 마주르카 C장조, Op. 67, No. 3

6. 전주곡 A장조, Op. 28, No. 7

7. 왈츠 C♯단조, Op. 64, No. 2

8. 화려한 대 원무곡 E♭장조, Op. 18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에 머무르던 댜길레프는 17세기 베네치아 극작가 카를로 골도니의 희곡을 토대로 발레를 만들었다. 댜길레프는 파리에서 라벨에게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소나타의 관현악 편곡을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자, 로마 작곡가 빈첸초 톰마시니에게 다시 의뢰했다. 베네치아 태생의 골도니는 1758년 방언으로 쓴 <좋은 기질의 여인들 Le morbinose>이 성공을 거두자 표준어로 개작해 <좋은 기질의 여인들 Le donne di buon umore>이란 제목으로 로마 토르디노나 극장에서 상연했다. 이때 반응이 좋지 못해 묻혔던 연극을 댜길레프가 춤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베네치아 사육제 기간. 들뜬 코스탄차와 펠리치타는 밀라노에서 온 리날도 백작(원작에서는 토스카나에서 온 페르디난도)을 놀려주기로 하고, 그에게 분홍색 리본을 단 여인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준비된 장소에는 여러 사람이 분홍 리본을 달고 나온다. 백작을 희롱하던 코스탄차는 이내 그에게 측은지심과 진정한 애정을 느껴 짝이 되기로 한다.    
리처드 보닝이 지휘하는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댜길레프가 레오니드 마신에게 골도니 당대 화가 프란체스코 과르디(Francesco Guardi)를 참고하라고 권했다. 마신은 그밖에 앙투안 바토와 피에트로 롱기의 그림 속 인물의 몸짓과 표정에서 영감을 얻었다. 마신은 동시대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와 안무가 라울 오제 푀예(Raoul Auger Feuillet, 1660-1710)를 연구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고르 마르케비치의 음반에 수록된 발레 모음곡의 트랙 제목을 통해 톰마시니가 고른 스카를라티의 소나타를 비교해 들을 수 있다. 555개의 짧은 소나타를 통해 스카를라티의 주제는 인간 감수성의 모든 것을 담은 듯이 다채롭고, 그 표현 방식은 자연을 묘사한 아라베스크만큼 정교하다.

     

1. Presto (Sonata in G major, K.2)

2. Allegro (Sonata in D major, K.435)

3. Andante (Sonata in b minor, K.87)

4. Tempo di ballo (Non presto) (Sonata in D major, K.430)

5. Finale (Presto) (Sonata in F major, K.445)

Scarlatti, Sonata in D major (K. 435) ©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같은 방식으로 조아키노 로시니를 편곡해 보자고 댜길레프에게 제안했다. 댜길레프는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던 요제프 바이어(Josef Bayer, 1852-1913)의 <인형 요정 Die Puppenfee>을 떠올렸고, 대본을 안무가 마신과 화가 앙드레 드랭에게 맡겠다. 1888년 빈의 황실 극장에서 초연된 <인형 요정>은 레오 들리브의 발레 <코펠리아 Coppélia>에 나오는 자동인형에서 착안해, 인형 장인이 만든 인형들이 손님들을 기쁘게 하고 종국엔 춤추고 노래하며 인형 요정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이다. 

Coppélia Act II – Mechanical Dolls (Marianela Nuñez; The Royal Ballet)

러시아로 건너간 <인형 요정>은 세르게이와 니콜라이 레가트 형제의 안무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마신은 여기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꿋꿋한 양철 병정 Den standhaftige tinsoldat>을 결합해 <이상한 장난감 가게 La boutique fantasque>의 대본을 완성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꿋꿋한 양철 병정
배경은 1860년대 파리(또는 니스, 나폴리라고도 한다). 세계적인 장난감 제작자가 춤추는 인형을 만들었다. 두 영국 부인과 미국 가족이 인형들의 춤을 구경한다. 타란텔라에 이어 카드놀이 복장의 인형이 마주르카를 춘다. 러시아 가족이 들어오자 다섯 코사크 인형이 흥을 돋운다. 마침내 주인의 자랑거리인 한 쌍의 커플 인형이 캉캉을 춘다. 그 정교한 춤사위에 감동한 미국 가족은 남자 인형을, 러시아 가족은 여자 인형을 각자 사기로 한다. 값을 치른 두 가족은 다음날 물건을 찾기로 하고 떠난다. 밤새 인형들이 깨어나 헤어질 두 연인을 구해주기로 모의한다. 다음날 손님들이 물건을 찾으러 왔지만 인형이 없자 주인에게 항의한다. 이때 코사크 인형들을 필두로 모두 궐기해 손님을 몰아낸다. 숨었던 캉캉 인형까지 나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창밖 손님들이 놀라서 바라본다. 
카우보이, 톰 행크스, 버즈

1919년 6월 5일 런던의 알함브라 극장(1936년 철거)에서 초연된 이래 <이상한 장난감 가게>는 큰 성공을 이어갔다. 파리 발레 관객은 같은 해 크리스마스 시즌을 이 작품으로 즐겼고, 이듬해 런던 재공연, 다시 1925년 파리 공연, 1929년 댜길레프의 생전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초연을 안무한 마신은 1921년 러시아 발레단을 떠나면서 이 작품과 헤어졌다가, 몬테카를로에서 다시 만난 뒤 평생 아꼈다. 부당하게도 오늘날 레스피기/마신의 걸작은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에 완전히 가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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