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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May 14. 2024

위대한 엔니오

음악사를 돌아본 일생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음악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작곡가 니콜라 피오바니가 선배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1928-2020)의 콘서트에서 말했다. “선생님 음악이 20세기 최고 아닌가요?” 모리코네는 “글쎄, 생각해 볼게”라고 답했다. <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엔니오 Ennio, 2021>는 위대한 영화 음악가의 삶을 유년부터 만년까지 면밀하게 추적한다. 주변인들의 찬사 일변도이지만 나는 같은 사건을 그들과는 좀 달리 읽었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192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뛰어난 트럼펫 연주자였고, 아들에게도 같은 악기를 권했다. 모리코네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음악가가 되었다. 그가 다닌 초등학교는 카리시미 거리(Via Giacomo Carissimi)에 있었다. 보르게세 공원 위쪽의 이 동네 거리 이름은 온통 음악가 이름에서 따왔다. 귀도 다레초,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아르칸젤로 코렐리, 니콜로 포르포라, 루이지 보케리니, 조반니 파이시엘로, 조아키노 로시니, 빈첸초 벨리니, 니콜라 파가니니, 사베리오 메르카단테 거리에, 주세페 베르디 광장까지 거미줄처럼 엮인 동네이다. 여기에 모리코네가 이름을 더할 수 있을까?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진학한 모리코네는 저명한 고프레도 페트라시(Goffredo Petrassi, 1904-2003)에게 작곡을 배웠다. 소년의 바람과 달리 선생은 온갖 춤곡만을 반복해서 작곡하게 했다. 뜻도 모르고 과제를 완수했을 때 비로소 리체르카르(대위법)를 쓰게 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많은 춤곡 모음곡을 썼고, 만년에 <음악의 헌정>이나 <푸가의 기법>을 통해 대위법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페트라시는 바흐보다 한 세기 전에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Girolamo Frescobaldi, 1583-1643)가 이미 다녀간 길임을 제자에게 일깨웠다.

모리코네가 학창 시절에 받은 가장 큰 인상은 로마를 찾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직접 지휘한 <시편 교향곡>을 들은 일이었다. 일생 그가 눈높이를 맞춘 최고의 음악이었다. 음악원을 최우등으로 졸업했지만, 작곡가의 길은 험난했다. 그 무렵 찾은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제는 그에게 실험정신을 일깨웠다. 존 케이지의 행위 음악이나 생활 소음을 활용한 구체 음악이 그것이다.

Stravinsky conducts symphony of psalms

그러나 막상 생계를 위해 모리코네가 시작한 일은 대중가요 편곡이었다. 단순한 반주에 그쳤던 기악에 좀 더 색채와 두께를 부여한 것뿐이었지만, 반응은 놀라웠다. 점차 영화계가 유능한 젊은 인재에게 관심을 보였다. <천지창조 The Bible: In the Beginning...>에는 원래 스승 페트라시가 참여했지만, 존 휴스턴 감독은 너무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제작자 디노 데 라우렌티스는 모리코네를 추천했는데 이번에는 그와 음반사가 맺은 계약이 걸림돌이었다. RCA는 모리코네를 놔주지 않았다. 헛물을 켠 페트라시는 영화 음악은 매춘과 같은 것이라며 애꿎은 제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모리코네는 부끄러웠지만 영화로 성공하고픈 오기도 생겼다. 

마침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이 <알제리 전투>라는 문제작의 음악을 부탁했다. 그는 프레스코발디의 대위법을 배운 대로 사용했다. 영화는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작곡가로서 모리코네는 확실한 원칙을 가졌다. 기존 음악을 영화에 그대로 쓰는 일에 힘을 보태지 않고, 자기가 직접 곡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이아이아~

평생 엔니오 모리코네와 가장 뜻이 맞은 감독은 세르조 레오네(Sergio Leone, 1929-1989)였다. 알고 보니 둘은 우연히도 카리시미 거리에서 함께 초등학교에 다닌 동창생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앞세운 마카로니웨스턴 시리즈에서 모리코네는 오카리나로 코요테 소리를 모방하고, 전자기타로 정처 없는 총잡이의 활약을 묘사했다. 역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알레산드로 알레산드로니는 남다른 휘파람 실력 덕에 불려 갔다. 모리코네의 서부극 음악은 일대 선풍을 불고 왔다. 이 음악에 가장 신난 사람은 팻 메시니와 쿠엔틴 타란티노이지만, 어디까지나 음악원 수석 졸업생 모리코네에게 그리 진지한 시도는 아니었다. 그는 대위법 작곡가이길 원했고, 주세페 파트로니 그리피 감독의 <어느 날 밤의 만찬>에서 두 멜로디를 교차했다. 앙리 베르누이의 <시실리안>에서는 중심 주제에 바흐(B-A-C-H)의 성부를 더했다.

이제 모리코네는 감독들이 가장 함께 일하길 바라는 영화 음악가였다. 심지어 폰테코르보 감독은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의 <식인종 I cannibali>을 위해 쓴 곡을 옆 방에서 듣고는 자기 영화 <번!>에도 똑같은 걸 써달라고 부탁했다. 엘리오 페트리는 <완전범죄>에 모리코네의 다른 곡을 임의로 썼던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가장 어이없는 일은 거장 프란코 체피렐리가 <끝없는 사랑 Endless love>의 음악가를 모리코네에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 것이다. 모리코네가 원래 그 영화에 쓴 주제는 대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의 테마’가 되었다. 원래 음악은 사후에야 편집을 통해 삽입되는 것이었지만, 로버트 드 니로는 처음부터 음악을 튼 채 연기하게 한 레오네 감독의 뜻에 십분 공감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노베첸토 Novecento>를 위해 쓴 ‘로만차’는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주세페 볼페도의 그림 <제4계급>의 군중을 화폭 밖으로 걸어 나오게 했다. 롤런드 조페이의 <미션>이야말로 모리코네를 거장의 반열에 올린 작품이다. 그는 예수회 수사의 오보에 독주를 바로크풍으로 썼고, 거기에 원주민의 타악기 소리와 가톨릭교회의 모테트를 더해 화면에 시공을 초월한 역동성을 부여했다. 이렇게 모리코네는 영화가 오페라의 전통을 계승한 예술임을 입증해 보였다.

모리코네가 마침내 어릴 적 뛰놀던 거리의 이름을 각인한 작곡가들과 나란한 사람이 된 것일까? 그가 말했듯이 모리코네의 대위법은 학창 시절 배운 프레스코발디나 바흐의 기법을 대중의 수준에 맞춰 재사용한 것이다. <시네마 천국>의 가장 감미로운 선율들도 브람스의 후기 피아노 소품이나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자기 복제로 일관한다. 

<미션>의 음악도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 기존 음악을 모방한 것이다. 오보에 선율은 바로크라기엔 시대가 불분명하고, 모테트는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나 <라우다테 도미눔>의 아류이다. 

가브리엘 가리도와 같은 남미 바로크 음악 전문가는 18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전례 음악을 여럿 녹음했다. 모리코네가 <미션>을 끄기 전 이미 교황청의 허가로 제삼세계 각국에서 자국어로 된 미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이 아니라도 <미션>에 쓸 대안은 차고 넘쳤다는 말이다. 

<러브 어페어>의 ‘감상적인 산책 Sentinmental Walk’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아디오스 노니노>와 똑같은 선율을 맥없이 반복한다. 

미란다 마르티노를 위한 <나폴리 노래집> 가운데 ‘오 솔레 미오’는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첫 곡 ‘빌라 보르게세의 소나무’를 반주로 썼다. 

<캐논 인버스 Canone inverso>에서 주인공 커플이 연주하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이중 협주곡은 조잡하고 시대착오적이라 엄격한 관현악법을 추구했던 페트라시의 제자가 쓴 것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쿠엔틴 타란티노는 “영화 음악이라는 척박한 환경 말고 모차르트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비교해도 모리코네는 최고”라고 허풍을 떨었다. 그가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얼마나 알고 한 말인지 몰라도 모리코네 본인은 “200년 뒤에 봅시다”라고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아무리 깎아내리려고 해도 모리코네의 명성에 조그마한 흠집도 낼 수 없다. 오히려 나도 그가 ‘이 시대 최고의 영화 음악가’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이의가 없다. 다만 영화가 원한 것은 ‘최고의 음악’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딱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정도의 음악이 필요했고, 모리코네는 그것에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하나였다. 운도 따른 덕분에 영화는 그의 음악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고, 지난 시대 오페라와 겨룰 수 있었다. 모리코네가 베르디나 푸치니와 견줄 정도는 아닐지언정,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미션>이 <라 트라비아타>나 <투란도트>와 비교할 우리 시대 예술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생 영화 음악을 벗어나고자 했던 모리코네는 마지막에 뜻을 이뤘다. 공로상만 받은 채 아카데미 본상과는 유독 인연이 없던 거장은 2015년 타란티노의 <헤이트풀 8>을 위한 곡으로 ‘오리지널 스코어’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을 오마주로 한 교향악을 이 서부극에 썼다. 모리코네가 한다는 데 토를 달 때는 지났다. 결국 모리코네는 어릴 적 우상에 다시 한번 매달렸지만, 그것을 알아들은 사람은 많지 않고 맹목적인 박수만 되울렸다. 여전히 사람들은 <헤이트풀 8>보다는 달콤한 선율이 감도는 영화들을 그의 대표작으로 떠올리지 않을까? 

내 생각에 모리코네의 경쟁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아니고, 선배 니노 로타, 또는 동료인 존 윌리엄스 정도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데에 200년까지도 필요 없을 것이다. 참고로 그가 살던 동네 거리에 헌정된 몇몇 이름을 되짚어 본다. 귀도 다레초는 ‘계명창’(도-레-미)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는 르네상스 ‘오페라의 시조’로 꼽힌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의 작곡가이다. 카리시미는 ‘오라토리오’의 모습을 다듬었다. 아르칸젤로 코렐리는 ‘협주곡’ 형식을 확립했다. 루이지 보케리니는 ‘실내악과 기타, 첼로 음악의 대가’였다. 조아키노 로시니와 빈첸초 벨리니는 ‘벨칸토’ 시대를 열었다. 주세페 베르디는 앞선 모든 것의 종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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