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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숨결

이탈리아 볼로냐와 라벤나 기행

by 정준호

2025년 노블레스 매거진 6월호 게재


대학의 발상지이자 미식의 고장(덕분에 ‘뚱보의 도시’로도 불린다), 아동도서전으로 유명한 볼로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곳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볼로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르네상스 조각가 니콜로 델라르카(Niccolò dell’Arca)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애도 Il Compianto sul Cristo morto>를 들겠다. 기독교 신앙이 있고 없음을 떠나 그만큼 이 테라코타(진흙을 구워 만든 조소)가 주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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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비명을 지르는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도 그녀의 고통이 시간을 초월해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머니 마리아의 모아쥔 두 손은 터질 듯한 오장육부를 부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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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스의 마리아의 두 손이 믿을 수 없다는 거부의 표시라면, 살로메 마리아는 두 다리뼈를 으스러트릴 악력을 드러낸다. 격한 여인들에 비해 턱을 괸 사도 요한, 무릎을 꿇고 관람객을 바라보는 니고데모의 인상은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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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이 장면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어야 하지 않은가! 힘없이 입을 벌린 주검은 생명이 빠져나간 상태이다. 수난의 비통함은 사흘 뒤 부활의 환희로 바뀔 것이다. 그는 생명의 숨결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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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라르카가 모든 드라마를 선점하기라도 한 듯이, 그 뒤로 이보다 격한 표현력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동시대 귀도 마초니가 델라르카의 영향을 받아 부세토에 만든 같은 주제의 테라코타는 그보다 훨씬 차분한 느낌이다. 볼로냐에 온 젊은 미켈란젤로는 델라르카가 성 도메니코 대성당에 만든 방주(Arca di san Domenico, 델라르카는 이 걸작에서 성을 따왔다)에 자신의 솜씨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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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로마에 가서 만든 <슬픔의 성모 Pietà>는 슬픔을 터트리지 않고 응축해 가둔 듯이 정적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절정이 아닌 그 직전의 순간을 포착해 긴장감을 극대화한 것은 선배의 작품을 보고 얻은 교훈 아닐까? 그렇기에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볼로냐 정복을 기념해 만든 청동상이 파괴되어 아쉽다. 교황이 물러가고 볼로냐가 잠시 해방되었을 때 페라라의 알폰소 대공은 청동상을 녹여 대포로 만들고, ‘율리아나’라는 이름을 붙여 교황을 조롱했다. 전쟁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 청동을 주조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이런 전례 때문에라도 미켈란젤로는 청동 대신 대리석을 소재로 삼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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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다윗>은 다부지게 서서 골리앗을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존재감을 다한다. 율리오 2세의 무덤을 장식할 <모세>를 완성한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감동한 나머지 망치로 두드리며 ‘일어서라!’라고 했다는 설이 전한다. 이 또한 홍해를 가르거나 십계명을 전파하는 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두커니 앉은 노인일 뿐이다. 급기야 만년의 미켈란젤로는 ‘미완의 완성’(Non finito)이라는 기법으로 조각이 스스로 깨어나기를 바랐다. 미완성을 깨울 숨결은 어디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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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는 1088년 세계 최초의 대학이 설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1666년 최초의 음악협회(Accademia Filarmonica di Bologna)가 조직되었을 만큼 문화 수준이 높았다. 1770년 잘츠부르크 태생의 소년이 볼로냐 음악협회에 가입 신청을 냈다. 14세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회원이 되었다. 협회장 잠바티스타 마르티니 주교의 가르침은 어린 모차르트에게 평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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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니의 이름을 딴 볼로냐 국립 음악원은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사람은 조아키노 로시니, 가에타노 도니체티 그리고 오토리노 레스피기이다. 그러나 오페라의 대가이던 두 선배에 비하면 20세기 초 레스피기가 마주친 상황은 좀 달랐다. 르네상스 이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주도한 이탈리아는 19세기 들어 점차 대중 취향에 영합하는 오페라에 국한된 환경을 자초하고 만다. 그 사이 후발주자였던 독일은 교향악과 협주곡이라는 순수 기악의 탄탄한 결실을 일구었다. 수준 높은 시에 붙인 예술가곡(Lied) 또한 통속적인 노랫말에 휘둘리는 이탈리아가 잃어버린 본연의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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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를 간파한 볼로냐는 바그너의 <로엔그린>, <탄호이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이탈리아 최초로 청중에게 소개했다. 볼로냐 음악원 원장 주세페 마르투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직접 지휘해 우물 안 이탈리아 청중의 각성을 촉구했다. 마르투치는 독일의 브람스에게 받은 영향으로 당시 이탈리아 풍토에서 매우 드문 순수 기악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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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르투치의 제자가 바로 레스피기였기에 그가 20세기 이탈리아 음악에 끼친 영향은 의미심장했다. 내게는 바로 레스피기의 음악이 잠자는 미완의 완성품을 깨운 숨결처럼 들린다. 볼로냐 시립 묘지에는 도시가 자랑하는 세 사람이 나란히 묻혀 있다. 이탈리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조수에 카르두치의 묘는 웅장하다. 칸초네 ‘카루소’로 유명한 루치오 달라는 스타 대접을 톡톡히 받는다. 태어나고 죽은 해조차 적지 않고 이름뿐인 레스피기의 무덤이 그사이 구석을 차지한다. 마치 삶과 죽음을 거부하는 바람(風)의 존재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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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정인 라벤나로 향하는 기차역 플랫폼에 연인과 이별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눈에 띈다. 기차와 바지와 역사가 이탈리아 국기의 삼색을 이룬다. 에밀리아 로마냐주 끝의 라벤나 또한 볼로냐와 마찬가지로 교황령의 오랜 중심지였다.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내 거점이 아드리아해에 면한 라벤나였기에 내륙의 볼로냐는 그리로 가는 요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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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나에 들어서면 이탈리아 어느 도시보다 깨끗하고 조용해서 다른 나라에 온 느낌이다. 마치 도시가 형성된 중세 이후로 외부와 격리된 듯하달까. 그렇다고 낙후된 것이 아니라 고풍스럽고 장엄한 비잔틴 문명과 현대적인 감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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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가 이곳 바실리카의 황금 모자이크와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유명한 <입맞춤>(Il bacio)을 결합해 자신의 <입맞춤>(Der Kuss>을 그렸음은 자명하다. 아예츠가 <로미오와 줄리엣>에 뿌리를 두었다면 클림트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귀결된다. 사실 거꾸로 르네상스 시대 <로미오와 줄리엣>은 중세 기사문학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변형이다. 사랑은 열정(Passion)에서 비롯되는데 열정에는 고통이라는 의미가 동반된다. 열정(고통)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 네 연인은 불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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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연인들

라벤나 시립 미술관은 중세에서 현대에 걸친, 덜 알려졌지만 수준 높은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뜰에 설치된 에도아르도 트레솔디의 <사크랄>(Sacral)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신비로운 성(城)을 형상화했다. 라벤나에 망명 왔다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단테를 기리는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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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용병대장 귀다렐로 귀다렐리의 무덤을 장식했던 조각은 박물관을 넘어 라벤나의 자랑이다. 마이클 온다치는 골든 부커상을 받은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화상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주인공 라즐로 알마시(동명 영화의 레이프 파인스 분)의 비범한 모습을 이 기사상에 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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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의 용병이던 기사는 생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죽기 전 직접 의뢰한 노르딕 풍 ‘지장’(Gisant, 장례 조각)의 아름다움은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다. 급기야 기사상에 입을 맞추는 처녀는 그해에 결혼하며, 기혼 여성은 전사처럼 아름다운 아이를 얻는다는 전설을 낳았다. 1935년 파리 순회 당시 조각에 입을 맞추려는 인파로 발 부분이 파손되었고, 입술도 립스틱 자국으로 오염되어 그 뒤로는 라벤나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20세기 말에는 현 조각이 진품이 아니라 19세기 복제품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기사상의 아우라는 훼손되지 않았다. 세기말의 탐미주의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라벤나를 ‘침묵의 도시’라 칭하며 이 조각을 예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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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큰 검 위에 손을 모으고
반듯이 누워 잠들었다
그의 무기력한 얼굴에는
철, 죽음, 고통이 봉인되었다
갑옷에 갇혀 새로운 날을 기다린다
(…)
봄은 너(라벤나)의 마음을 쓰라리게 비튼다
그리고 네 위로는 단테의 재가 바람에
꽃가루처럼 지나간다

볼로냐의 그리스도가 그렇듯이 라벤나의 기사도 부활을 꿈꾼다. 클림트가 <베토벤 벽화>에 그린 황금 갑옷의 기사처럼 라벤나의 기사도 선택받은 여인의 입맞춤으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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