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토스카나 기행
친퀘테레(Cinque Terre). 이탈리아 북서해안에 옹기종기 자리한 다섯 마을을 이르는 지명이다. 이런 곳은 경험상 화창한 날보다는 찌푸린 날 풍광이 더 멋지다. 예상처럼 먼바다에서는 마치 물뿌리개로 물을 주는 듯이 먹구름 아래로 비가 쏟아진다. 그 사이 어딘가는 햇볕이 내리쬐는가 하면 코앞에선 거센 바람에 정박한 배가 출렁인다. 절벽에 자리 잡은 사람마다 넘쳐나는 자기애(narcissism)를 카메라에 담는다.
다시 차를 달리자 금방 바탕화면에 어울릴 법한 토스카나 전원이 펼쳐진다. 키안티, 몬테풀치아노, 사시카이아 같은 수준 높은 와인을 낳는 옥토이다. 자연의 선물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천 개의 탑의 도시’라는 산 지미냐노에 도착했다.
18세기 초 한 영국 여행자는, “원래 로마는 ‘종탑의 도시’였으나 미켈란젤로의 성 베드로 대사원 이후의 로마는 ‘돔의 도시’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고딕(탑)이 르네상스(돔)로 바뀌는 과정을 얘기한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돔을 갖지 못한 산 지미냐노는 중세의 박제이자 타임캡슐이다. 그 점이 더 많은 발길을 불러 모으는 것이리라. 프란코 체피렐리의 자전적 영화 <무솔리니와 차 한 잔>에서 영국 할머니들은 산 지미냐노 두오모의 벽화를 지키려고 목숨까지 건다.
작은 별 돌아가는 꼴이 모순덩어리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일인 독재 국가는 ‘공화국’을 자칭한다. 거꾸로 민주주의의 중심이라 자부하는 최강국은 서슴없이 제국주의적 패권을 휘두른다. 이 나라 안에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명제가 반복 충돌하지만 해법은 요원하다.
로마 제국과 그 뒤를 잇는 이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로마 자체가 공화정과 제정, 과두제를 오갔을 뿐만 아니라, 중세에 군소국으로 나뉜 뒤에도 권력의 독점과 분배를 놓고 다툼이 이어졌다. 르네상스를 낳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대표적이다. 공화정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으로 과도한 권력이 쏠릴 때마다 시민들은 그들을 끌어내리곤 했다. 결국 메디치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1478-1534)는 피렌체를 공국(公國)으로 만들려는 오래된 야심을 이루고야 만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 약탈(1527)을 자행하자 피렌체는 혼란을 틈타 메디치 가문을 축출했다. 황제가 물러가고 사태를 추스른 클레멘스 7세는 조카 알레산드로를 직접 공작으로 임명해 복수했다. 알레산드로가 암살된 뒤 대가 끊기자, 방계의 코시모 1세가 집권했고 교황 비오 5세는 그의 지위를 토스카나 대공으로 올렸다. 이렇게 해서 공화정 피렌체는 인근 너른 지역을 포괄하는 메디치 가문의 군주국이 되었다. 피사, 시에나, 아레초, 루카처럼 오래전부터 싸우고 달랬다가 무릎 꿇리기를 반복했던 이웃 도시를 토스카나 대공국의 영토로 두었다.
찬란한 르네상스를 완성한 피렌체는 19세기말 이탈리아가 통일되었을 때 짧게나마 수도가 되었다. 정치적 중요성 때문에 곧 로마로 천도하지만, 피렌체의 상징성은 작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황제가 퇴위한 공화국 독일이 괴테와 실러의 도시 바이마르를 수도로 삼았던 것이나 매한가지이다. 황제의 나라 독일과 교황의 나라 이탈리아는 끝없는 권력을 탐한 끝에 만신창이로 나뉘었다가 결국 둘 다 공화정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오페라와 멜로디(이탈리아), 교향악과 음렬음악(독일)이 화려하고 맹렬하게 양쪽 귀를 잡아당겼다. 어느 해 화창한 날씨에 거창한 밑그림이 머리를 뒤덮을 때 피렌체를 떠난 기차가 아레초에 닿았다.
역 앞 광장부터 아레초의 첫 주인공이 반긴다. 아레초의 귀도(Guido d’Arezzo, 992-1050)는 우리가 아는 계명창을 고안한 사람이다. 성 요한 찬가의 가사 중 머리글자를 따서 ‘우트(도)레미파솔라(시)’라는 음이름을 붙였다. 만든 원리를 상술한 명판에서 서양음악의 초석을 놓은 아레초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아레초에 오는 이유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받은 인상 때문이다. 때 묻지 않은 주인공 귀도(왜 이름이 ‘귀도’인지는 자명하다)가 사랑하는 ‘공주’ 아내를 얻고, 알토란 같은 아들과 노닐던 시내를 떠올리는 글이 인터넷에 숱하다.
그러나 내가 아레초에 온 것은 귀도들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가보고 싶다. 아레초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에는 그가 그린 <진짜 십자가 이야기> 벽화가 있다. 제단 뒤 삼면을 둘러싼 대작의 줄거리는 야코포 보라지네의 <황금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아담의 죽음: 먼 옛날 천사들의 권유로 아담의 아들이 아버지 무덤에 심은 에덴동산 사과나무 가지가 뒷날 그리스도를 못 박은 십자가를 만드는 데 쓰인다.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의 만남: 시바의 여왕이 아담의 나무로 만든 다리를 숭배하였고, 솔로몬에게 구세주가 그 나무에 매달릴 것이며 그로써 유대 왕국이 분열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솔로몬은 나무를 베어 묻어버렸지만, 나중에 로마인들이 그것을 발견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꿈: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 앞서, 천사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꿈에 나타나 십자가를 보여준다. 방패에 십자가를 새긴 대제는 적을 물리치고, 뒤에 기독교로 개종한다. 진짜 십자가의 발견과 증명: 콘스탄티누스의 모후 헬레나가 십자가를 찾아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정보를 아는 자가 함구하자 모후는 그를 구덩이에 던져 굶주림으로 고문했다. 결국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묻힌 자리를 자백했다. 발굴된 세 개의 십자가(예수와 양옆 죄수의 것) 가운데 진짜를 가리려고 막 죽은 시신을 가져왔다. 진짜를 가져다 대자 시신이 살아났다.
헤라클리우스와 코스로에 간의 전투: 7세기,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 간 전투에서 십자가가 다시 승리를 가져온다. 십자가 찬양: 십자가를 탈환한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그리스도처럼 맨발로 골고다를 순례하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도시에서 달려와 성물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는 이 벽화를 리카르도 무티가 현지에서 지휘한 요제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일곱 말씀> 영상물에서 처음 봤다. 20세기 체코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의 모음곡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도 내 품에 들어왔다.
첫 곡은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 두 번째 곡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이며, 끝 곡은 전체 그림의 인상을 담았다. 음악과 성화의 장엄한 아우라가 나를 아레초로 이끌었다. 마침내 오랜 바람이 눈앞에 펼쳐졌고 벽화는 친퀘테레 앞바다나 토스카나 평원과 견줄 만큼 도도했다. 기독교인도 아닌 나는 무엇에 매료된 것일까? 아마도 기원전 600년부터 화가 당대인 15세기까지 2천 년이 넘는 시간을 담은 박제에 집착한 것이 아닐까! 마이클 온다치도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이 그림을 언급했다.
이탈리아 동해안에 주둔하던 인도인 공병 킵은 자신에게 통조림을 건네준 고마운 영국 고고학자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아펜니노산맥 넘어 아레초에 데려와 도르래로 끌어올려 벽화를 가까이서 관찰하게 했다. 뒷날 킵은 지뢰를 탐지하며 서늘한 진흙에 얼굴을 댔을 때 그림 속 시바 여왕의 목덜미를 만졌던 촉감을 떠올린다. 생사기로의 절박함을 관능미와 바꾼 것이다. 동명 영화는 고고학자를 킵의 여자친구 해나로 바꾸어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아레초에 다녀온 지 한참 지나 나는 ‘진짜’ 20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루이지 달라피콜라가 피에로의 벽화를 두고 쓴 <두 소품>을 알게 되었다. 첫 곡 ‘사라반드’는 시바 여왕의 방문을, 둘째 곡 ‘팡파르와 푸가’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승전과 입성을 묘사한다. 달라피콜라는 이 관현악을 12음 기법으로 썼다. 순수 기악은 성악의 나라 이탈리아가 오랫동안 잊었던 것이요, 12음 기법은 멜로디의 나라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아랑곳없이 달라피콜라는 공화국과 제국, 오페라와 교향악의 시대를 타임캡슐에 담는 데 비로소 성공했다. 그러나 더는 귀 기울이는 사람이 드물다. 먼 훗날 새 인류가 그 가치를 온전히 알까? 모두 피사의 기울어진 탑을 자기 손으로 받치는 사진 찍기에 열중이다. 나도 쭈뼛하며 자기애에 동참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