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이탈리아 기행 (마지막)
2025년 8월호 노블레스 매거진 개제
종이가 귀하던 시절엔 한번 썼던 양피지를 지우고 다시 쓰곤 했다. 이때, 앞서 쓴 흔적이 다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팔림세스트(Palimsest)라 했다. 덧대어 쓴 흔적이나, 정보가 겹친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삶이 여전히 그렇다. 비단 글쓰기뿐만 아니라, 메시지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 새로운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이 팔림세스트와 같다. 벌써 여러 차례 로마를 여행하며 갔던 곳을 또 가고 새로운 곳을 더하는 동안 도시의 인상은 덧칠된다.
이번 이탈리아 기행의 전반부 목적이 파르마 베르디 축제를 보는 것이었다면 후반부는 아시시 방문이 하이라이트이다. 중세 고도 아시시는 로마와 피렌체에서 모두 세 시간 걸리는 외딴곳이다. 남북이 긴 이탈리아이고, 로마에서 피렌체가 기차로 1시간 반 걸리는데, 그 사이의 아시시가 양쪽 어디서나 3시간 걸린다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굳이 로마에서 아시시에 가려고 피렌체를 떠났다. 로마 오페라가 36년 만에 재공연하는 발레 <적과 흑 Il rosso e il nero>을 보기 위해서였다. 원작인 스탕달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赤)과 흑(黑)이란 19세기 프랑스에서 출세에 이르는 두 가지 길, 곧 군인이나 성직자를 의미한다. 목수의 아들 쥘리앙 소렐은 나폴레옹(적)을 동경하지만 그의 시대는 끝났기에 신부(흑)가 되기로 결심한다. 먼저 신부의 추천으로 드 레날 시장 집 가정교사가 된 소렐. 그런데 드 레날 부인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시녀의 질투로 불륜이 발각되자 신학교로 피하지만 그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의 재능을 아낀 교장의 추천으로 파리의 왕당파 귀족 드 라 몰 후작의 비서가 된 소렐은 꿈꾸던 상류사회에 발을 들인다. 여기서도 그는 후작의 딸 마틸드와 밀고 당기는 사랑을 벌인다. 소렐을 못마땅해하던 후작은 딸을 위해 그에게 작위와 장교직을 수여하며 결혼을 허락한다. 그때, 소렐이 여인을 출세에 이용하는 파렴치한이라고 고발하는 드 레날 부인의 편지가 도착해 결혼이 무산된다. 분노한 소렐이 교회에서 부인에게 총을 쏘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부인은 죽지 않았고, 여전히 사랑하는 소렐을 면회 온다. 소렐은 감옥에서 두 여인을 만나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지만 결국 처형된다. 마틸드는 잘린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부인은 사흘 뒤 숨을 거둔다.
내가 알기로 <적과 흑>을 춤으로 만든 사람은 둘이다. 1988년 독일의 우베 숄츠는 스탕달 시대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여러 음악을 편집해 안무했다. 이번에 내가 볼 것이다. 2021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피에르 라코트의 안무로 <적과 흑>을 선보였는데, 이때는 베를리오즈의 후배 오페라 작곡가 쥘 마스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들을 사용했다. 로마 오페라 발레단이 36년 만에 새로 제작한 이번 공연은 세간의 기대만큼이나 훌륭했다. 조르조 데 키리코를 연상케 하는 감각적인 세트와 주인공들의 내적 갈등을 녹인 호소력 있는 춤은 19세기 혁명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스탕달을 21세기로 불러오는 데에 성공했다.
대략 이렇게 쓰고 평을 끝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난 처음부터 이 발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숄츠가 <적과 흑>을 위해 끌어들인 베를리오즈는 낭만주의 프로그램 음악의 창시자이다. 숄츠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헛소동>, 바이런의 <이탈리아의 해럴드>와 <해적> 따위를 위해 베를리오즈가 쓴 관현악을 스탕달의 소설에 덧씌웠다. 둘의 연결고리는 모두 혁명의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이라는 점뿐이다. 마스네의 음악을 쓴 라코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같은 사랑의 장면이라도 베를리오즈의 셰익스피어나, 마스네의 괴테는 스탕달을 간섭하게 마련이다. 난 흔적을 다 지우지 못한 팔림세스트를 본 것이다.
사실 숄츠는 <적과 흑>을 자신의 멘토였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존 크랑코에게 헌정했다. 나는 크랑코가 차이콥스키의 여러 음악으로 짜깁기한 발레 <오네긴>을 같은 점 때문에 비판했다. 엄연히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오페라가 있음에도 크랑코는 차이콥스키의 다른 곡들, 가령 <대장장이 바쿨라>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의 음악들로 안무했다. 내게는 혼란스러운 잡탕이었다. 그에 대해 내가 블로그에 쓴 글을 한 무용 애호가가 꼬집었다. 내가 춤을 음악에 종속된 것이라 폄하하고 안무가의 자율성을 무시했다는 지적이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다 만 논쟁이 다시 떠올라 이번에 AI 클로드와 대화했다. 어차피 AI는 사용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로 기울기 때문에 그(녀)는 내게 동조했다. 중립적인 의견을 재차 구했다. 클로드는 크랑코나 숄츠의 발레가 음악이나 소설의 창작 의도를 무시하고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한, 진지하지 못한 접근이라 답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권위에 도전하는 목소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제도권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역시 내가 듣고 싶은 얘기로 정리한다. 좋아해야 할까, 아닐까? 이른바 이름값에 기생하는 ‘주례사 비평’이 사라져야 진짜 예술이 다시 피어날 텐데, AI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답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조차 필요악일까?
다음날 나는 진짜 목적지인 아시시로 향했다. 아시시는 ‘이탈리아의 녹색 심장’이라 부르는 움브리아주에 있다. 이런 자연이라면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도록 계속 교통이 불편한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여 명의 내 동행 대부분은 미국에서 여행 온 남미계 가톨릭 신자였다. 나는 이들 중 프랑코 체피렐리의 영화 <성 프란체스코 Brother sun, sister moon>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난 영화에서 본 성자의 삶에 너무나 감동해 그의 고향 아시시까지 왔는데 말이다. 다행히 현지 가이드가 내 소감에 동의해 준다.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1181?-1226)는 원래 기사도에 탐닉해 십자군에 자원하려 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트라우마를 얻고 돌아온 그는 어느 날 아침 자연의 부름에 눈뜨고 무소유의 삶을 살고자 속세를 떠난다. 스탕달식으로 말하자면 ‘적’을 추종했던 청년이 ‘흑’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버려진 산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는 데에 매진한다.
처음엔 그를 비웃고 따돌리던 친구들이 진실한 그의 모습에 감동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동료는 소녀 키아라(영어로 클라라 또는 클레어)였다. 프란체스코의 이상을 가장 잘 이해한 그녀는 여성 공동체를 이끌었다. 아시시의 골목과 유적지마다 영화 장면과 겹쳤다. 대성당에 도달해 일몰의 장관을 마주하자, 도너번이 부른 주제가가 떠오르며 눈과 귀가 맑아진 느낌이다.
프란체스코의 세가 점점 불어나자, 기존 교단은 그들을 이단 취급했다. 프란체스코와 친구들은 로마까지 맨발로 걸어가 교황의 알현을 청한다. 자신들이 옳은 길을 걷고 있는지 직접 묻기 위해. 마침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무너지려는 라테란 성당을 프란체스코가 어깨로 지탱하는 꿈을 꾸었다. 교황은 황제로부터 위협받던 교권을 지키기 위해 프란체스코의 순수한 공동체를 자기편으로 받아들였다.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사람은 더 늘었다. 그의 제자 보나벤투라부터, 20세기 헤르만 헤세와 G. K. 체스터턴,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가 ‘하느님의 어릿광대’를 자칭한 성인의 삶에 헌정하는 글을 썼다.
최근 내가 인상 깊게 본 책은 드니 드 루즈몽의 <사랑과 서구 문명>(1939)이다. 이 인문 고전의 부제는 ‘트리스탄 신화에서 시작된 서구 천 년 정념(열정)의 역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낭만적 사랑’이란 개념이 중세 궁정의 음유시인들이 만든 개념이라는 학설은 상당히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그 핵심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설에 있다.
루즈몽에 따르면 음유시인들의 기사도적 사랑은 금욕적 교리를 따르는 ‘카타리파’와 결합해 프란체스코에게 전해졌다. 이상적 여성을 향한 기사도와 프란체스코의 청빈한 신앙은 사랑의 같은 모습이란다. 파르마의 <솔로몬과 시바 여왕>, 프란체스코 아예츠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별>과 <입맞춤>, 라벤나의 기사상, 스탕달의 주인공까지 여행에서 본 사랑의 아이콘이 모두 프란체스코의 벗이었다.
단 몇 시간에 불과했지만, 아시시에서 덧입혀진 생각은 새롭지 않다. 함께 나누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나는 맨날 춤이 먼저냐 음악이 먼저냐 따위만 따진다. 그럴 거면 차라리 클로드가 나보다 낫지 않을까? 묻기가 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