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않길 잘했네.
내게는 발레 레오타드가 3벌이 있다. 그중 이 파란 레오타드는 가장 오래된 레오타드인데 가슴 쪽이 점점 늘어나 위에 레이어드 해서 뭘 입지 않으면 곤란한 레오타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열심히 세탁해서 착용하고 있다. 사실 발레 수업받을 때 수강생들은 각자 자기 몸을 보고 운동하기 바빠 선생님 외에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기에 타이즈가 구멍이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초등학교 때 발레 학원을 가는 학원차 안에서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핑크색 발레가방을 보고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땀이 베인 가죽 발레슈즈를 바닥에 앉아 신고 벗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그 냄새 또한 왠지 모를 셀렘이었다. 신기한 건 딸아이가 어렸을 때 신었던 가죽 발레슈즈에도 똑같은 설렘의 냄새가 배어있다는 것이다.
당시 선생님은 살짝 굽 있는 검은 댄스화를 항상 신고 있었고, 숏컷의 도시적인 여인의 느낌의 헤어스타일에, 검은 아이라인이 항상 위로 향해있었다. 고개와 시선도 언제나 반듯하게 위로 향해있는 느낌이었다. 목소리 톤도 기억에 남는 것이 아마도 그때 같이하던 친구들과 팀으로 콩쿨 준비를 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는 듯하다. 참가곡도 잊히지 않는다.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중 '꽃의 왈츠'. 그 곡이 너무 좋아서 카세트테이프로 집에 모셔두었던 기억도 있다. 어쨌든 간에 꽃의 왈츠 기본 스텝을 얼마나 연습했었는지 아직도 몸이 기억하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콩쿨에서 다행히도 팀이 입상을 했고 노력의 성과를 얻은 후 메달을 목에 걸고 상장을 추켜올리며 성취감에 취해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매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당시 모두가 진한 화장에 굵은 아이라인이 모두의 얼굴에 덮여있었고 잔머리 한 올 남김없이 엄청난 양의 스프레이를 뿌려대며 올백으로 머리카락을 넘겼었는데 나 혼자 눈 화장은 벅벅 지워져 있고 앞머리를 살짝 내려 찍었다는 게 포인트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 당시 내 눈을 잡아먹은 검은 아이라인이 너무 싫어서 우리 순서가 끝나자마자 무대에서 내려와 혼자 지워버렸던 것이다. 분명 액체를 붓으로 내 눈에 그린 것 같은데 건조되니 스티커처럼 떼어지는 그 검은 아이라인. 비록 단체 사진에는 내 눈만 떼꼼하게 나왔지만 화장을 지우고 스프레이에 딱딱해진 앞머리를 내려 흐트러뜨리며 드디어 끝났다는 후련함과 성취감을 친구들과 만끽했던 그 기억은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아이를 낳고 몸관리를 하기 위해 지난날에 했던 운동이 발레 밖에 없어서 익숙한 운동을 선택했다. 나와 맞는 학원을 찾기까지 쉽지는 않았지만 상황에 맞게 그래도 운동을 지속해 오다 육아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 때 몇 년을 내려놓은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중학생이 된 후 저녁 시간이 자유로워져서 맘먹고 다시 시작한 발레가 이제 일 년이 되어간다. 꾸준하게 한 결과 코어 근육이 조금씩 자리 잡는 느낌이 온다. 호흡조절 덕분에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기도 하고.
저 파란 레오타드를 버리지 않길 잘했다.
세탁 후 빨리 건조되라고 방에 걸어둔 저 모습이 발레와 관련된 지난 여러 셀렘의 기억들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