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꿈꾸는 어린이
나도 네가 싫지만 그래서 이해하고 싶어.
나는 건담을 좋아한다. 특히 비우주세기 작품 중 더블오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다.
건담에 대해 무지한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공통적인 패턴이 드러나는데, 그건 바로 건담이 소년 파일럿이 거대로봇과 함께 펼치는 모험이야기 정도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는 작품도 있긴 하다.) 하지만 건담은 그런 인식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어두운 내용을 담고 있다.
여러 건담 시리즈가 있지만 시리즈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을 나열하자면 건담을 비롯한 수많은 기체들은 전쟁 병기로 인식된다는 것과 전쟁의 참혹성을 다루며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활기차고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난 영화를 볼 때 체력을 소모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우는 일이 잘 없다. 아니, 영화를 보고 운 적이 없다. 근데 건담을 보고 운 적은 있다. 위에서 언급한 더블오 시리즈의 극장판을 봤을 때의 일이다.
군인 집안에서 자란 파일럿이 절대 방어선을 뚫고 돌진하는 적을 막기 위해 온몸을 던져 이를 저지하는 장면이었다. 그 파일럿은 군인 집안에서 성장했는데 어머니를 죽게 만든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일럿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했고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TV판 결말쯤에 다다라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와 같은 참된 군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TV판에서 퇴장한다.
나는 그 파일럿이, 자신이 지키는 지구연방의 시민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장면에서 살짝 눈물을 흘렸다.
“나는 시민을 지키는 연방의 군인이다!”라는 말을 뱉으며 부모님을 떠올리는 연출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위기가 닥치고 위태로운 순간, 주인공과 주인공의 건담이 전투가 아닌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전쟁을 마무리 지으며 더블오 극장판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에필로그가 시작된다.
주인공은 건담을 타고 50년이 지나 자신을 이해하고자 했던 어느 여인의 집으로 향한다.
그 여인은 백발노인이 되고 눈까지 멀었지만 주인공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싸움이 아닌 대화가 진정한 평화로 가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그 여인을 꼭 안아준다. 그리고 주인공이 타고 온 건담은 모든 무기를 버린 채 꽃밭에 착륙해 온몸이 꽃으로 변하고, “평화는 힘이 아닌 오직 이해로만 이룩할 수 있다.” 는 아인슈타인의 격언이 조그맣게 떠오르며 더블오 시리즈는 끝난다. 이 장면은 아주 오랜 세월 내 머릿속에 각인된 명장면 중 명장면이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이해와 평화를 이룩한 영화가 내 취향인 줄 알았다. 인터스텔라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어둡고 우울한 영화, 예를 들면 박하사탕, 밀양, 초록물고기 (맞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팬이다.), 마더, 패왕별희, 곡성 등... 하나 같이 이해와 평화 같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들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상대방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학창 시절에 본 더블오 극장판의 영향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나는 내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을 했는지 점점 깨닫게 되었다. 내가 살아오며 만난 몇몇 사람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나의 호의를 이용하거나 무시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아니, 작지 않은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이 무서운 게, 이해하려는 습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글만 봐도 그렇다. 내가 어떤 일에서 이용당했고 상처받았는지 적지 않는 까닭은 그들 입장에서 그 행동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정당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악의를 품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돌아와서, 그래서 오히려 어두운 영화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깊고 절망적인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정이 충분히 이해되기에, 그 영화의 주인공의 심정을 알 것 같아서, 설득당해서 오히려 어두운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혹은 일방적인 이해로 상처받은 내 마음이 외치는 투정 같아서 일수도 있다. “나도 이해받고 싶어.”라는 투정말이다.
지금은 이해에 대한 환상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습성이라는 게 참 무섭다. 머리론 완전한 이해가 환상이라 생각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나는 아직까지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믿는 어린 아이다. 이해하고 싶다. 상처받기 두렵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해하고 싶고, 이해하려 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