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의미
의미 - 고통 - 행복
스터디카페에서 공부를 한다.
조금 늦었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더 좋은 환경에서 그 일을 하고 싶어서 스터디카페에 간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쉬는 시간을 가진다. 그때마다 난 주차장으로 내려와 전자담배를 피운다. 한 개비당 14번의 호흡을 들이마실 수 있다.
하루는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친구들은 다 직장을 다니는데 나 홀로 멈춰 선 느낌.
미래가 불투명하기로 소문난 예술에 내 삶을 온전히 의탁한 데서 오는 불안감.
부모님의 건강.
앞으로 있을 시험.
시험을 핑계로 해결하지 못한 채 방치해 둔 여러 자질구레한 문제들.
한 번 주차장에 내려가면 2개비를 피우고 다시 올라가는데 그날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한 개비를 더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42번의 호흡을 위해 한 시간을 투자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42번의 호흡을 끝내고 다시 스터디카페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인생은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스터디카페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수능 시즌, 수많은 수험생을 지나 내 자리에 앉은 나는 다시 볼펜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행복하다."
머릿속에 가스등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고통과 행복은 불과 연기 같다. 고통의 불이 피어올라야 행복이라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법. 그러나 많은 사람이 불은 피우지 않은 채 연기만을 손에 쥐려 노력한다. 연기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불을 피우는 걸 망각한 채 말이다.
고통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난센스다. 하지만 굳이 고통받고 싶지 않으려는 건 어찌 보면 인간의 본성이란 생각도 든다. 고통이 주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인내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 나는 해답을 의미에서 찾았다.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런 목적성이 없기에 인간은 개별적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 의미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의미 없는 삶은 목적성이 없고 공허하기에 죽음을 지연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의미를 가진 삶은 목적을 가진다. 개인은 그가 스스로 정한 의미를 위해 살아가며 활력을 얻는다. 그 활력이 행복이라면 역순으로, 의미와 행복 사이엔 고통이 반드시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인생이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도, 내 마음을 짓누르던 걱정과 불안도 결국 그것이 존재함으로써 희망이 된다. 내가 고통스러운 건 적어도 나는 의미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재미있는 역설을 생각해 낸 나 자신이 대견하다.
고통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건 땔감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땔감은 의미다.
적어도 내 삶은 그저 생명 연장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기운을 낼 수 있었다.
42번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아닌 더 웅장하고 자욱한 연기가 내 삶을 위로해 줄 것이다.
그리고 또 고통받을 것이다. 이 순환은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육신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고통받는 건 사실 피할 수 없는 것이구나, 아니, 오히려 필요한 것이구나. 고통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42번의 호흡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고통받을 것이다. 그리고 인내할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