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mille Nov 11. 2024

위버멘쉬에 대해

의지의 긍정

왜 살아가는가?
CANVA AI로 제작

GD가 8년 만에 컴백했다.

선공개곡 초반부에 짧막히 '위버멘쉬'라고 말한 덕에 위버멘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다.

위버멘쉬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려 한다.

참고로 어떤 철학적 해석이라기보단 내 주관적인 견해에 가까움을 미리 밝힌다.


또한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약간의 죄책감이 있음을 밝힐 수밖에 없다.

이유는 내가 가톨릭 신자기 때문인데, 위버멘쉬는 기본적으로 신이 죽은 상태를 가정해야 설명이 된다.

그래서 조금 죄책감이 든다. 아무튼 이건 넘어가고,


위버멘쉬를 영어로 직역하면 over-man이 된다.

인간 위의 인간이라는 뉘앙스 덕에 한 때 위버멘쉬는 초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여러 논의가 오간 끝에 위버멘쉬는 위버멘쉬를 고유명사로 써야 한다는 결론이 났지만 초인이라는 표현이 개인적으로 더 직감적인 단어 같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쇼펜하우어는 대표적인 염세주의자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에 비유했다. 고통을 인생의 본질로 본 것이다.

고통은 참기 힘들다. 고통을 피하려는 건 생물이 가진 본능이다.

하지만 고통을 피할 순 없다. 태어나서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럼 그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서양 세계는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예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고통스럽게 돌아가셨기에 인간 역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이전까지 부여된 고통의 의미였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삶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런데 니체가 그 신을 죽여버렸다.


삶이 절대자에 의해 창조되고 사랑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면 삶의 의미를 논하는 게 소용이 있을까?

그러니까,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자면 고통의 의미를 논할 이유가 있을까?

서양 세계는 이런 방식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은 왜 고통받는가에 대한 답을 피해왔다.

니체는 여기에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니체는 존재가 불분명한 신의 존재 대신 인간의 의지를 긍정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되물었다.

"신이 죽었다. 그렇다면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삶은 고통이며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고 신도 죽어 사라졌다.

그렇다면 개인은 스스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야 하며 고통을 짊어지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 사상이다. 즉, 신이 죽었다면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은 의미를 상징하는 존재다.


난 가톨릭 신자지만 니체의 위버멘쉬 사상을 좋아한다.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나 역시 삶 그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이 단순히 죽음을 지연시키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


삶은 고통스럽거나 권태롭다.

그러나 나는 고통받길 원한다.

내가 고통받는 이유는 내가 의미를 위해 무언갈 하고 있단 뜻이기 때문이다.

고통 이후 잠시 행복이 찾아오겠지만 내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또다시 고통받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고통스럽다면 그건 긍정의 신호다.

무언가 자기 삶에 의미가 있다는 뜻이니까.

거창할 필요 없다. 삶의 의미란 개인적인 것이므로 애초에 크고 작음이 없다.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앞으로의 내 삶을 설계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설계한 길로 나아가기 위해선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 고통을 감내하는 인간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다.

여러분도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 고민하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변명 속엔 미학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