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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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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ille Nov 12. 2024

영화<솔라리스>비평

이해의 가능성

가장 아름다우면서 슬픈 영화
출처: 왓챠피디아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난 이후라 그런지 몰라도 이해가 훨씬 빨랐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겸손인 것 같다.

흔히 이 영화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동유럽 판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서구권의 솔라리스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두 가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는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특징이고 또 하나는 시대적 배경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소련에서 태어났지만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다.

때문에 그의 영화 속에선 종교적 상징이나 메시지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극 중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기독교 신앙에 기반한 해결책을 제시하곤 한다.

실제 이 영화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강한 그림이 많이 등장하고,

결말에 크리스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 구도는 그 유명한 돌아온 탕아를 묘사한 그림 속 아버지와 탕아의 구도를 그대로 차용했다.


이 영화는 1972년도에 개봉했고 당시 소련은 미국과 냉전 중이었다.

미국은 72년도를 기점으로 베트남에서 전투부대를 완전 철수하고 소련과 첫 핵무기 제한 협정을 맺었다.

냉전이 한 차례 소강상태를 맞은 것이다.

물론 이는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누적된 양 진영 간 피로도의 영향도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반전 영화라고 생각한다.


타르코프스키는 몽타주의 대가다. 쇼트와 쇼트의 연결을 통해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는데 능하다.

극 초반부, 타르코프스키는 갑자기 일본의 도시 풍경을 쭉 보여준다. 그것도 꽤 길게 말이다.

그리고 크리스는 솔라리스로 떠난다.

이는 미지의 세계 솔라리스 행성이 냉전 시기 자유 진영 국가의 메타포라는 걸 알리기 위한 연출이다.


솔라리스 행성의 바다는 인간의 뇌파를 감지해 인간의 의식 속 존재를 현실화할 수 있다.

주인공 크리스 앞엔 10년 전에 사별한 전 아내가 나타난다.

깜짝 놀란 크리스는 처음 나타난 아내를 로켓에 태워 멀리 날려 보내지만,

두 번째로 나타난 아내에겐 감정을 느끼고 그녀를 아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먼저 솔라리스에 도착해 연구를 진행하던 사르토리우스 박사는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다.


박사는 솔라리스의 물질화된 존재는 중성미자로 구성되어 생물로 부를 수도 없다며 멸시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닌가? 나는 똘이장군 만화에 괴물로 등장하는 북한군을 떠올렸다.

사르토리우스 박사는 상대 진영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극 중에서도 중성미자를 제거하는 빔을 쏴 이런 현상을 멈추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마치 핵폭탄으로 상대 진영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사르토리우스 박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새로 만들어진 아내를 진짜 아내처럼 아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점점 교감하며 서로 이해해 간다.

심지어 아내가 자신이 실제 크리스의 아내가 아님을 자각했을 때도 크리스는 그녀를 사랑했다.

화면 귀퉁이에 살짝 걸려 못 본 관객이 많았겠지만, 작중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오는 장면이 그려진 그림이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아기 예수의 잉태를 마리아에게 알리며 이렇게 덧붙인다.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기독교 세계관 속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다.

나는 타르코프스키가 이 그림을 그냥 배치해 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짜가 아닌 솔라리스의 아내의 딜레마, 그리고 냉전 중인 상대 진영과의 갈등.

이 모든 것을 해결할 답은 사랑에 있다고 타르코프스키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극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크리스는 사랑과 이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은 매우 염세적이다.


솔라리스의 아내는 자신을 위해 영원히 솔라리스에 남겠다는 크리스를 위해 직접 빔을 쏠 것을 요청한다.

세월이 흘러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품에 안긴 크리스의 모습도 사실 솔라리스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결말을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가능성, 특히 이해의 가능성으로 가득한 바다를 빔으로 쏘듯, 결국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며 제일 안타까운 건 캡쳐본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영화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왓챠에서 스크린숏을 못 찍게 막아놨다. 내 컴퓨터가 맥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기계 이미지와 자연 이미지의 대치, 물과 얼음, 그리고 불. 정말 눈여겨볼 것이 수두룩한 영화다.

인간의 가능성은 이해 속에 있다는 희망.

그러나 결국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절망.


이 영화가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슬픈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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