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서 편집 작업을 하며 타인이 쓴 원고를 다듬으면서 짧게 한 문장 정도를 덧대기도 하고, 책이 나온 뒤에는 그 책을 서점과 미디어에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쓰기도 하지만 그런 일들을 두고 글을 썼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분명히 뭔가 쓰기는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남의 글'을 갖고 일을 한 것이지 '내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다시 뜬금없이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영화 <비상선언>을 보고 나서였다. 영화에 대한 감상이나 평을 남길 생각은 없었고, 그냥 영화 속의 비행 장면들을 보면 나도 한 번쯤 과거의 내가 경험했던 비행들을 기록해 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엄청나게 많은 비행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해외 체류일수를 모두 더하면 3년 가까이 되는 꽤 긴 시간이기에 그 안에서 승객으로서 여러 나라의 많은 항공사들을 이용했다. 그냥 그런 경험들을, 그때의 감정들을 적어두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비행 공포에 대한 것도.
내 인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본 건 아홉 살(1990년) 아니면 열 살(1991년) 때였다. 출발지는 김포공항, 도착지는 제주공항이었다. 항공사는 대한항공이었다. 많은 것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첫 탑승 후 이륙할 때의 그 이상한 기분, 어지럽고 메쓰겁고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으로 가득했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쾌함이 기억난다. 토를 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속이 굉장히 불편했고 마음 역시 편치 않았는데, 크게 불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난 많이 어리기도 했고 비행기를 탑승해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기에 비행으로 인한 불안, 공포 같은 걸 느낄 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무서운 느낌은 아니었고, 그냥 뭔가 좀 편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한동안은 비행기를 탈 일이 없었다. 우리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었지만, 네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닐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마 그 부족한 마음의 여유는 필시 경제적인 것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약 15년이 지난 후 나는 인생 두 번째 비행을 하게 된다. 중고생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내 마음의 고향 홍콩에 가게 된 것이다. 군복무를 하며 모은 약간의 돈과 부모님께 받았던 일종의 제대 축하금으로 홍콩행 항공권을 끊었다. 이용한 항공사는 홍콩의 캐세이 퍼시픽(Cathay Pacific)이었다. 이 비행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첫 비행'이었다고 할 만한 경험이었는데, 혼자서, 성인이 되어, 외국에 처음 가보는 것이었고 외항사의 비행기를 탄 것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탄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보는 것이었고,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나는 아주 일찍, 매우 일찍 공항에 도착했고, 해당 항공편의 카운터가 열리자마자 보딩패스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응대해주시던 직원이 오늘 비행에 비즈니스 좌석이 한 자리 비었다고 업그레이드를 해주시겠다는 거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감사하다는 짧은 인사만 남기고 비즈니스 티켓을 받았다. 당시 나는 비즈니스와 이코노미 좌석, 서비스에 큰 차이가 있는지도 몰랐고 좌석 업그레이드라는 게 흔히 있는 일인가 싶어서 별 생각이 없었다.
이후에 비행을 제법 많이 하게 되면서 업그레이드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냥 그날 내가 매우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아침 일찍 공항에 갔던 것, 그리고 그냥 옷을 좀 포멀하게 입고 있었던 것말고는 특별히 다른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왜 업그레이드를 해주셨는지 이유는 전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비행에 대한 기억은 사실 크게 남아 있지 않다. 구형 비행기여서 비즈니스 클래스라고 해도 자리가 엄청나게 넓거나 좋지는 않았다는 것, 자리에 앉자마자 승무원이 음료를 한 잔 가져다주셨던 것 정도만 기억난다. 다른 기억은 없다. 그 후로는 비즈니스를 타볼 기회가 전혀 없었기에 그때 그 기억이 선명하지 않은 건 좀 아쉽다...
3년 정도 지난 후 탑승하게 된 비행기는 캐나다 토론토로 어학연수를 하러 갔을 때 이용했던 에어 캐나다(Air Canada)였다. 10시간 이상의 장거리 비행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기체 문제로 이륙이 많이 늦어져 비행기에 탄 채로 6~7시간을 보냈던 게 기억난다. 몇몇 사람들이 에어캐나다는 원래 이런 문제가 많다, 이 정도 지연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다고 말했던 것 같다. 특별히 항의를 하거나 크게 문제를 삼는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어캐나다는 1년짜리 오픈 티켓으로 끊었기에 11개월 후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할 때도 이용했다. 그때는 특별히 출발 지연 같은 문제는 없었다. 한 가지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면 그때만큼 기장의 안내방송이 잘 들린 적이 없었다는 거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귀국편 비행에서 기장의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뿌듯하고 뭐랄까 부모님께 죄송하지는 않은 뭔가 좀 떳떳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후로 내 영어 능력은 점점 하향 국면,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그때처럼 기장의 안내방송을 100% 가까이 이해한 적은 두 번 다시 없었던 것 같다.
아...캐나다 어학연수 중 한 친구와 1주일간 쿠바를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용했던 항공사는 당시 내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곳이었다. 코파 에어라인(Copa Airlines)이라는 항공사였고, 파나마 기업이었다. 한때 미국의 콘티넨탈 항공이 많은 지분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상징색 등 전반적인 분위기가 비슷한 느낌이다. 콘티넨탈 항공도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유나이티드 항공이 되었지만, 로고와 컬러는 비슷하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 지금도 코파 에어라인과 흡사하다.
토론토에서 쿠바로 향할 때 폭설이 심해, 사실 폭설 정도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심각한 악천후여서 당시 약 70~80%의 비행이 결항되거나 지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구가 탄 비행기는 정상적으로(?) 출발해 꽤나 긴장이 됐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게 좋으면서, 이렇게 뜨는 게 맞는 건가 싶어 두려움도 컸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처럼 그 비행은 난리도 아니었다. 3~4시간 정도의 비행 동안 엄청난 터뷸런스의 향연이 펼쳐졌고 기내의 분위기가 꽤나 심각했다. 나와 친구는 물론이고 함께 탑승한 대부분의 캐나다 승객들 그리고 승무원들까지 쿠바 아바나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 다들 미친듯이 박수를 쳐댔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후로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할 일이 많았고, 두 항공사는 언제나 준수한 서비스를 제공해줘 특기할 만한 별다른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 같다. 2011년에는 남미에 여행을 떠나면서 독일의 루프트한자(Lufthansa), 프랑스의 에어프랑스(Air France)를 이용했다. 둘은 국내에도 워낙 잘 알려진 세계적인 항공사들이고 내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아에로리네아스 아르헨티나스(Aerolineas Argentinas), 브라질에서는 탐(TAM)과 골(GOL), 우루과이에서는 플루나(Pluna)를 이용한 적이 있다.
한번은 플루나 항공을 타고 브라질 히우 지 자네이루에서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 이동하려는데, 전 남미의 항공편을 거의 멈추다시피 한 칠레 화산 폭발로 인해 비행기가 뜨지 못한 적이 있었다. 자연재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항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후속 대응이 있을지 걱정도 됐고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다. 다행히 히우 공항 안에 있는 고급 호텔에서의 1박과 중식-석식-조식 총 3끼의 식사를 제공해줘서 공항 호텔에서 스테이케이션을 취했다.
통으로 하루가 주어진 것이니 다시 공항 밖으로 나가 히우 여행을 좀더 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나는 히우의 매력과 위험을 모두 충분히 경험한 터라 다시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호텔에서 쉬면서 공항 구경도 하고 사람들한테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영어로 말도 걸면서 나름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당시 내가 탔던 플루나 비행기는 70~80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는 작은 기종이었는데, 이후 지금까지 탑승한 모든 비행기를 통틀어 그렇게까지 작은 기체를 타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남미 여행과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정확히 어떤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국제선은 브라질 브라질리아 혹은 상파울루에서 출발했던 것 같고, 미국 디트로이트까지는 델타 아니면 아메리칸에어라인을 탔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는 정말 뭘 타고 왔던 건지 기억이 희미하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 전혀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때 처음으로 비행 중 낙뢰를 맞았다는 거다. 순간 기내에 모든 불이 잠깐, 아주 잠깐 1~2초 정도 꺼졌다 다시 들어왔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밤이었는데, 인천까지 다 온 비행기가 악천후 때문에 착륙도 하지 못하고 대전까지 내려갔다가 전라도를 넘어 거의 제주도를 찍고 다시 올라와 대전, 충청도 주위를 맴돌았다. 거의 한 시간 정도를 한국 상공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떠 있었다.
겨우 겨우 아주 힘들게 예상 도착 시간보다 두 시간 가까이 지난 후에 착륙할 수 있었다. 사실 난 그때 분명 내가 탄 비행기가 낙뢰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잠시잠깐 정전이 되었던 거라고 생각하는데, 훗날 관련 기사나 자료를 찾아보니 비행기가 낙뢰를 맞아도 기내 안 승객들을 그 사실을 느끼기 어렵다는 설명이 많았다. 정말 그런가?! 그럼 그때 왜 잠깐 비행기 안 모든 불빛이 꺼졌던 걸까?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그 현상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난 그날 이후로 비행 공포증이 더 심해졌다. 그 이전까지의 비행 공포와는 좀 차원이 다른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비행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공항을 가는 순간부터,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여행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의하기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목적지에 착륙해서 해당 도시의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빠져 나와 택시든, 버스든, 지하철이든 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0년 전에 쓴 책에서는 '현관문을 열고 집 밖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여행이 종료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던 것 같은데, 뭐 그것도 그럭저럭 맞는 말이지만, 어쨌든 비행기를 타는 것은 전혀 즐길 수 없는 일이다. 비행이 너무나 싫다는 말로 내 비행담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