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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칠레 Oct 05. 2016

푸르티쟈, 초대받지 못한 손님과 호수 난장이

오래전 이야기,
 
다른 승객들을 따라 눈을 비비며 버스에서 내린다.
버스 터미널에서 마주한 첫인상. ‘어 이상하다. 잘못내렸나.. 이런곳이 아닐텐데…’
살짝 남아 있던 잠기운이 깨끗이 달아난다.
내 표정이 옆에 서있던 기사아저씨에게 전달된다. 길건너 보이는 콜렉티보를 타고 푸르티쟈 바하 (Frutillar Baja)로 가라고 알려준다. 시외버스는 터미널이 위치한 푸르티쟈알토(Frutillar Alto)까지만 운행한거다..  
 
두번정도 커브를 꺽은 콜렉티보는 금방 내리막길을 탄다.
‘우와’ 나도 모르게 짧은 신음이 터진다.
상상못한 경관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질때는, 감탄이 아닌 신음에 더 가깝다.
완벽한 좌우대칭 반짝이는 하얀화산이 얼음같은 호수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다.
손 내밀면 잡힐것만 같다.
바로 이웃한 푸루띠쟈 윗동네에서 푸루띠쟈 아랫동네로 이동은 완벽한 반전이다.
 
넓게 펼쳐진 호수변 모래사장.
드문드문 늦은 오후 일광욕을 즐기는 피서객,
유모차를 끌고 산책중인 젊은 부부.   
세상에나! 이렇게 평화로울수도 있을까…


2016 푸르티쟈 (Frutillar)


굳이 론리플래닛을 꺼낼 필요도 없다. 번갈아 고개를 돌리며, 왼편 화산 한번, 오른편 마을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다. 동화속에서나 튀어나올법한 풍경. 첫번째 마주한 호스텔은 몇번 벨을 눌러도 응답이 없다. 다음 호스텔. 벨을 누르고 한참뒤 문이 열린다. 문을 열어준 주인아주머니 손에는 채 내려놓지 못한 뜨게질 거리가 그대로 양손에 들려 있다. 마치 ‘너는 대체 왜 우리집 문을 노크했니’하는 무표정에, 반사적으로 목이 움츠러든다.
애써 웃어보며 “방 있나요?”   
 
2층으로 안내받는다. 낡은 듯 하지만 넓고 깨끗한 2인실 방. 나무창문이 밖으로 열려있다.
고개를 내밀어 본다.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을 호수와 화산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러고 보니 이동하느라 점심도 걸렀다. 주섬주섬 돈만 챙겨 내려온다.
'삐걱 삐걱' 오래된 나무층계 소리가 정막을 깬다. 호스텔에는 다른 손님은 없었다. 나와 주인아줌마 둘뿐.

아주머니는 안락의자에 깊게 몸을 안긴채 뜨게질에 집중하고 있다. 이방인의 등장을 애써 외면한다.

어색한 정막을 깨며 묻는다.
“저…근처에 식당은 어디에 있나요?”
마지못해 눈을 떼고 바라보는 시선에는 난감한 표정이 가득하다.
천천히 말문을 연다.
“오늘 연 식당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호텔이 있어요”
바로 다시 고개를 떨구고 털실을 잡는다.
 
그렇다. 이날은 2000년 12월24일이다.
그리고 난 칠레에서 크리스마스가 어떤 의미인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호텔을 향해 터벅터벅 걷는다. 잠시사이 공기가 더 차갑고 청명해졌다.
건너편 화산은 점점 색이 변한다. 하얗게 반짝이던 봉우리가 조금씩 핑크빛으로 물든다.
카운터에서 식당을 물어본다. 2층으로 올라가란다.
홀에는 아무도 없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호수 건너 화산은 이제 짙은 핑크빛이 절정이다.

난생 처음보는 황홀경에 잠시 배고픔을 잃는다.
중년 아저씨가 다가온다. 이제 곧 문을 닫는다면서, 음료수 정도는 마실수 있단다.
맥주도 되냐고 묻는다.
"뽈 수뿌에스또" (당근이지!)
 
맥주를 잔에 따르는 사이 화산은 힘을 잃고 잿빛으로 변하고 있다.
그 여운을 음미하며 맥주잔을 비운다.
조금씩 어둠이 깔리는 호수변을 따라 왔던길을 되돌아 걷는다

내가 묵는 호스텔을 지나쳐 호텔 반대쪽으로 향한다.
 
대로변 식당이 보인다. 닫혀 있다.
다음 발견한 식당도 마찬가지다.
길에는 아무런 인적조차 없다.

12월24일 저녁, 최대 대목에 문을 연 식당이 없을수 있다는...
그때까지는 그런상상을 해 볼 이유가 없었다.

몇걸음 더 걷다보니 빨간색 외관, 아기자기 귀여운 식당에 불이 환하다.
입구엔 난장이 인형들이 반기고 있다. 행인이 모두 사라진 거리와는 달리,

창문넘어 보이는 내부엔 손님이 가득하다.


Tripadvisor 캡쳐

기쁜맘으로 문을 열고 식당안으로 들어선다. 왁자지껄하던 식당이 갑자기 조용~.

한사람 한사람 모든 시선이 낯선 이방인에게 쏠린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아놀드슈왈스제네거가 어울리지 않는 차림과표정으로 린다헤밀턴을 찾기위해 나이트클럽에 들어서는 그순간, 춤추던 모든 남녀가 일순간 얼음이 되며 아놀드를 주시하던 바로 그 모습.


Tripadvisor캡쳐

남쪽으로 여행을 시작하며, 동양인을 보는 신기한 시선에 어느정도 익숙해 지긴 했지만...
 ‘이곳은 아주 많이 더하구나’.
개념치 않고, 재빨리 눈만 돌려 빈자리를 찾는다. 제일 안쪽구석테이블이 비어 있다.

다닥다닥 붙어 비좁게 앉아 있는 손님들 의자뒤로 '실례합니다'를 낮게 속삭이며 헤집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한다. 꽉찬 식당에 혼자 4인용 테이블 차지하고 싶지 않은데, 다행히 조금 덜 미안하게 2인용 테이블이다.

‘이젠 살았다.ㅎㅎ. 오늘은 돈 아끼지 않고, 이것 저것 다 시켜 먹으리’

그순간 만큼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자리에 앉은 후에도, 식당안 분위기는 내가 입장하기 전 모습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적막은 깨지지 않고, 모든 손님들의 힐끔힐끔 시선은 여전하다.


'이거 모.. 전설에 나오는 인육만두집도 아니고'

둘러봐도 웨이터는 보이지 않는다. 느긋하게 기다린다.
‘ 당연한거지, 다들 문닫고 여기만 열려 있으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인인듯한 사람이 주방에서 나와 다가온다.
테이블 옆으로 채 가까이와 서기도 전에 먼저 살인미소를 날리며,
“메뉴판 좀 주세요”
 
“……”
난 그때 어쩔줄 몰라, 세상에서 가장 당황한 사람 표정을 보았다.
모라 모라 설명하는데, 오래된 영화 늘어진 테이프의 끊맺지 못한 음향소리를 듣고 있다.
 
그렇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문을 여는 식당은 어쩌면 칠레 전체, 아니 남미 전체에서도 찾을수 없는그런날이라는 것.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영업을 위해 열어놓은 식당이 아니었다.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동네 어떤 가족모임,아니면 동네 이웃간 성탄전야 모임을 갖던 자리인 것이다.
그런 자리에 왠 동양인이 거침없이 들어와 자연스레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버리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용수철 튀듯 일어나 도망치듯 식당을 나온다.
한참 멀어질때까지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돌려보지 못했지만,

"왁작지껄" 식당은 금방 다시 생기를 찾고 있었다.


먼훗날 다시 찾은 그 식당 이름은

사막의 식기루처럼 날 불렀던,

Duendes del Lago (호수 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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