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하루를 가득 채워주는 빗줄기는 즐겁기도, 슬프기도 하다.
비가 오는 날의 기억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어릴 적 나는 비가 오면 설레었다.
작은 장화를 신고 골목을 뛰어다니며 고인 물웅덩이를 일부러 밟고,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의 비는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것 같았고, 나는 그 소리 안에서 괜히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비는 달라졌다.
누군가의 차가운 말 한마디에 마음이 쏟아져 내렸던 날, 나는 일부러 우산을 접었다. 빗속에 서 있으면 눈물인지 빗물인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는 위로였고, 숨을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오늘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문득 깨달았다. 이제 나는 비가 좋아서도, 슬퍼서도 서둘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저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아 벌써 이 계절도 저물어 가는구나’ 하고 짧게 중얼거린다. 계절의 알람시계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사랑과 이별, 설렘과 상처를 지나왔다.
비가 오면 아직도 지난 사랑들이 스쳐간다. 함께 걷던 빗길, 비에 젖은 어깨, 그때는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말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 모든 장면을 담담히 떠올린다. 애써 눈을 감지 않아도, 억지로 웃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그저 조용히 창문에 귀를 기울인다. 언젠가 다시 장화를 신고 비 소리를 따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두르지 않는다. 나에게 계절은 이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쳐가는 것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