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주는 종이 하나

by 서령

책상 위에 놓인 하얀 휴지 한 롤. 아무도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는 그 존재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가만, 필요할 때마다 가장 먼저 손이 가는 건 늘 그 조용한 하얀 종이였다. 나는 가끔 휴지를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이 단순한 사물이 어쩐지 우리 삶과 닮아 있지는 않을까 하고. 휴지는 언제나 흡수한다. 눈물이 흘러내릴 때, 뜨거운 커피가 쏟아질 때, 혹은 실수로 흘린 소스가 손가락을 타고 내려올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휴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지저분한 것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럽혀지고, 찢기고, 결국 버려지면서 자기의 존재 이유를 다한다. 나는 거기서 어떤 희생을 본다. 그리고 그 희생이야말로 일상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순간들은 결국 사라지고 버려지지만, 그 순간마다 흡수하고 감싸주던 것들이 모여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낸다.


휴지는 흡수할 뿐 아니라 덮어주기도 한다. 깨진 유리컵 조각 위에 살짝 올려 손을 다치지 않게 해 주거나, 얼룩을 감추기 위해 책상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덮는다는 건 위로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다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잠시라도 감추고 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때로는 솔직한 말보다, 조용히 덮어주는 무언의 배려가 더 큰 힘이 되곤 한다. 휴지의 하얀 면이 그러하듯, 위로도 말보다는 흰 여백처럼 고요히 다가와야 빛을 발한다.


휴지는 오래 남지 않는다. 한 번 쓰이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고, 그렇게 쓰이고 나면 쓰레기통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바로 그 ‘소멸성’ 때문에, 휴지는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한다. 짧고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존재 같지만, 그 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우리의 하루도 이와 같다. 매 순간이 소모되고 흩어지지만, 그때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작은 실수를 감싸주며, 가벼운 웃음을 남겼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결국 남는 것은 오래도록 빛나는 무언가가 아니라, 사소했지만 분명히 있었던 그 순간의 온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그런 바람을 품는다. 거창한 무언가를 남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순간 조용히 건네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사라진 후에도 "그때 네가 있어줘서 고마웠어"라는 기억 하나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흔적이 아닐까. 휴지는 결코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곁에서, 순간을 지키고, 흔적을 덮고,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그 겸손하고도 단단한 태도가, 오히려 진짜 삶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질수록, 나는 책상 위의 하얀 휴지를 바라본다. 형광등 불빛 아래 고요히 놓여 있는 그 작은 존재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너도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 오래 남지 않더라도, 필요한 순간 곁에 있어주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도 쓰이고 사라질 나의 하루가, 어쩌면 그 자체로 충분히 빛나고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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