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걸음

by 서령

밤은 낮의 흔적을 천천히 거두어들이며 세상에 고요를 드리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사라진 거리에는 정적이 내려앉고,

공기 속에는 낮 동안에는 느낄 수 없던 서늘한 향기가 번져든다.

나는 그 고요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어둠은 내 어깨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내 안에서 흩날리던 소음들도 조금씩 잦아든다.

마치 세상이 나에게만 허락한 산책의 시간을 열어주는 듯하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문득 꽃을 만난다.

낮에는 무심히 스쳐 지나쳤던 작은 화단의 꽃송이가

밤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는

한 송이 별처럼 고요히 빛나고 있다.

햇살 속에서 당당히 피어오르던 낮의 꽃과는 달리,

밤의 꽃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더욱 진실하게 속삭인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피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묵직한 위로가 된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오래도록 꽃을 바라본다.

내 안에서 일렁이던 외로움이 꽃의 고요와 겹쳐진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

홀로 꽃 앞에 서 있을 때 외로움은 오히려 덜 낯설다.

외로움은 나를 무너뜨리는 적이 아니라,

내 곁에 앉아 있는 오래된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꽃은 그 그림자를 이해한다는 듯,

흔들리되 꺾이지 않고, 고독하되 꺼지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다.


이어폰 너머로 잔잔한 선율이 흘러온다.

피아노의 낮은 건반 소리가 공기를 흔들고,

내 발걸음은 그 리듬에 맞춰 천천히 이어진다.

꽃잎이 바람에 미묘하게 흔들릴 때면,

그 흔들림마저도 음악의 선율과 닮아 있다.

나는 그 순간 깨닫는다.

위로란 거창한 말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밤길을 걷다 불현듯 마주친 꽃 한 송이,

새벽까지 이어진 음악의 떨림 속에도 충분히 숨어 있다는 것을.


걷다 보면 하늘이 조금씩 풀려나간다.

검은 장막 위로 희미한 푸른빛이 번지고,

동쪽 끝자락에서는 가는 실선처럼 빛이 스며든다.

새벽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그 경계 위에 서서

묘한 감정에 잠긴다.

긴 밤을 함께 걸어온 고독이 서서히 물러나고,

새로운 하루의 숨결이 내 안으로 흘러든다.


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밤과 새벽 사이, 시간의 틈새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피어 있다.

나는 그 꽃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네듯 눈길을 머물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음악은 어느새 끝을 향해 다가가고,

내 안의 외로움은 파도의 잔향처럼 서서히 가라앉는다.


산책은 그렇게 끝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라기보다 시작에 가깝다.

밤이 품어준 외로움과 꽃의 숨결,

음악의 여운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다가오는 하루를 단단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알게 된다. 오늘 밤에도, 그리고 그다음 밤에도

나는 다시 이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외로움을 만나고, 꽃을 바라보고, 음악과 함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며,

새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갈 것이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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