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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진 Jul 15. 2019

백수, 라는 이름의 행복

세상에서 가장 값진 백수생활

오랜만에 일기다.


수영을 시작한 지 3개월째, 벌써 접영반에 들어갔다. 하루 1시간 강습과 1시간 개인 연습으로 폭풍성장했다. 평포자(평영 포기자- 막간 수영인 언어)가 될까 했지만, 초급반 강사님(당신은 수영계의 박항서)에게 다시 배우면서 자세를 바로 잡아가고 있다.

수경을 사고 열쇠고리를 받았는데, 너무 귀여워서 당장 채웠다. 차키 꺼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수영강습에서 중급반은 항상 사람이 넘친다. 심지어 아침 9시 수업인데도 우리 반은 정원 35명을 훨씬 초과한 46명이다. 중급반 안에서도 평영반, 접영반, 접영 숙달반으로 나눠서 강습이 이뤄진다. 강사님이 1명이기 때문에 엄청 바쁘다. 그런데도 한 명 한 명 자세 다 잡아주고, 안 되는 부분도 말씀해주신다. 배움에는 선생님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을 참 잘 만났다.


이번 주엔 접영 양팔 동작을 배웠다. 접영 물타기는 정말 재밌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 너무 재밌어'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리고 손이 수면과 가까워졌을 때 다시 팔을 누르며, 정확히 나비가 되어 짧은 비행을 한 다음,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때의 쾌감이란.


어쨌든. 양팔 접영 동작을 배웠던 그날, 2바퀴 연습한 후 한 사람씩 동작을 했다. 이게 뭐라고,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마찬가지. 한 사람씩 동작을 선보이면 선생님이 잘한 점과 잘못된 점을 짚어주셨다. 드디어 내 차례. 신나게 물타기하고 나비가 된 다음, 물속에 수직으로 내려가 바닥을 짚고 올라오는 동작을 선보여야 했는데, 바닥을 짚고 올라올 때 박수소리가 들렸다. 어떤 아저씨가 "이거네 이거!"라고도 했다.


직감적으로 내가 잘했나 보다 알았지만, 물 밖으로 나와 수경을 올리고 보니 좀 민망했다. 박수소리가 계속되기도 했고,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이게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정신없는 내게 선생님이 잘했다고, "엉덩이 올라오는 거 보였지요? 어깨 쑥 집어넣는 것도 보셨지요?"라고.


뭐 솔직히 기분 째지게(!) 좋았다. 언제까지 백수생활을 할 수 없으니,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니, 하는 동안 미치고 싶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한 것인데 박수를 받을 줄은 몰랐거든. 대단히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승의 가르침대로는 했구나 싶어서 뿌듯했다.

비가 많이 오던 날 사직수영장 가는 길(왼쪽), 사직수영장에 사는 길냥이! 맨날 얘 보고 싶어서 고양이 간식도 샀지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야옹야옹하는 바람에 간식주기 실패(오른쪽)

직장을 그만두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백수 생활에서 내가 얻고 있는 깨달음이 있다. 


'나 스스로 굉장히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겠다' 하는 나에 대한 깊은 믿음이다. 나의 결정을 나와의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다. 내가 운동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고, 하나에 미치면 끝장 보는 인간이라는 발견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나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 헬스도 시작했다. 오늘이 3주째. 최첨단 헬스기구 (친구들은 최첨단이라는 말에 폭소했다)가 있는 밀론 헬스다. 헬스를 시작하고는 이동시간, 샤워시간 포함 하루 6시간을 운동하는 데 보낸다.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을 때 아프고 싶지 않다. 일 할 때 아픈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다이어트 목적(10킬로 감량 성공)도 있지만, 체력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지난주 발행한 블라디 여행기 2편의 조회수는 이제껏 쓴 브런치 글 조회수를 다 합한 수를 뛰어넘었다.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백수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이상하게 그렇게 말할 때 기분이 좋아진다. 변태 같지만 정말 그렇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정말 온전히 나를 위해 쓰니까.


좋아하는 일을 미치도록 하면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 이 얼마나 행복한 백수생활인가. 


소중한 이 하루들을 차곡차곡 성실히 쌓아 올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백수생활을 했었노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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