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게 된 건
그 아이 때문이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던 미대를 입학한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작업에 대한 아무런 욕구가 없었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과제를 하거나,
점수를 받기 위해
억지로 작업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 모든게 거짓 같아서 싫었다.
스물 여덟이 되던 해에
누군가를 알게 됐는데,
내가 정말 많이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일종의 동경 같은거였다.
어렸을 때 멋있어 보이는 연예인을 보고 좋아하던,
그런 종류의 느낌이었다.
누렇게 바랜 작업실 벽지 위에
아무렇게나 낙서를 하거나 글을 쓰고,
끝내주는 음악을 만들고,
가끔은 못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늘 독특한 향기를 진하게 풍기는 아이였다.
완벽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아이의 모든게 멋있어 보였다.
나도 미친 듯이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해서
시급 6500원을 받으며
무기력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저 그런 시시한 연애들에 지루해 하면서,
미래도 없이 매일 술을 마시던 때였다.
우울하고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 애를 만나게 됬다.
그 애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향을 피우고,
외출할 땐 늘 어떤 향기를 잔뜩 풍기고,
새벽이면 그림을 그렸다.
여전히 작업을 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어렵다.
세상이 나의 그림을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나약해빠진 생각을 할때도 많다.
그래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지.
계기가 어떻든,
그래도 내 선택으로
내가 다시 좋아해서 시작했는데,
한순간의 좌절로
나와 맞지 않는 일을 하고
가보지 않은 길을 동경하며 살게 되는건 싫었다.
나는 뭐든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물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찾아오는 많은 우연들은
늘 이렇게 순간적이고 아름답고 잔인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또 한번
찰나같은 우연들이 찾아올것이고,
나는 무너질것이며,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반복하며
나를 괴롭히겠지만,
상관없다.
수많은 우연한 일들이 쌓이고 가득해져서,
지금의 나를 만든거니까.
과거는 언제나 지나치게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때의 충격은 벌써 다 잊었다.
그리움과 고마움과 설렘만 남았을 뿐.
이제는 그애가 하나도 밉지 않다.
정말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