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엔 비가 온다.
기분도 답답했고,
오늘은 반드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것저것 잔뜩 챙겨 좋아하는 카페로 왔다.
어제 Y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뭐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의 이혼에 관한 얘기,
단발머리에 관한 얘기,
이름에 관한 얘기 등등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끝에는 예술가들의 철학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야기의 결론은,
나는 남의 말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라는 것.
아주 틀린말은 아니지만,
Y가 내게 그렇게 말을 했을 때,
무언가 모를 반항심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마구마구 올라왔다.
나는 주변의 영향을 무척 잘 받고,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그 흡수력이 매우 빠른 편이긴 하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철학이
분명 있다고 반박했다.
Y는 주변의 영향을 잘 받는 것과
자기 철학이 강하다는 말은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라,
절대로 그 두 가지는 같이 갈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예술가는 어떤 순간에도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만의 확고한 철학이
반드시,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그 철학으로 예술가는
본인만의 방식으로 시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끄집어내야 한다고.
그래야 좋은 예술가라고.
그런 정신이 없다면,
예술을 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누구보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나에게.
카페에 와서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쓴다.
나는 무언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언젠가,
내가 어떤 순간에 행복함을 느끼는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
아주 여러 종류의 행복들이 있겠지만,
역시 나를 가장 충만하게 만들어주는건
사랑이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나를 인정받고, 사랑받을 때.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때.
그래서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 표현방식이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솔직한 마음의 말일 수도 있고,
차마 말로는 전하지 못해 쓰는
절절한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림은 내가 가장 나만의 개성으로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것들을 그린다.
내 그림을 보게 되는 모두에게
어떤 대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표현하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
'저는 이런 것들을 좋아해요.'
'귀엽고 예쁜 것들을 사랑하지만,
제게는 이렇게 지독한 우울도 있어요.'
'채도가 낮고 어두운,
이런 종류의 색감들을 좋아해요.'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저라는 사람이 이곳에 있어요.'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예술가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이런 생각들로 그림을 그린 다는 건
어쩌면 모순인 걸까.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야기들인 걸까.
너무 일방적인 걸까.
너무 시시한 이야기들일까.
아무도 내 이야기에는,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에는,
나의 우울들에는 관심이 없는 걸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우울을 겪는 누군가에게
나의 축축한 글과 그림이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닌 걸까.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걸까.
사실 그동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듯 작업을 했었는데
이런 오만가지 생각들이 가득한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연필조차 들기 싫다.
정치라든가
사회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사랑이 중요했다.
내 인생에 사랑이 빠지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이 고양이에 관한 것이든
나의 연인에 관한 것이든
부모나 친구에 관한 것이든
상관없었다.
사랑만 있으면 버틸 수 있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의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키의 글이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맨 처음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접한 건,
상실의 시대.
나는 열아홉이었고,
그때는 그냥 야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했다.
서른이 지나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는 그의 문체들에
큰 거부감이 없다.
특별히 사회적이라거나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진 않았지만,
소설 속엔 하루키 자신이 있었고
그 시대의 분위기가 있고,
특유의 문체로 그만의 세계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 느낌이 굉장했다.
글을 쓰시는 나의 엄마는
하루키를,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뭐라고 할까. 스토리는 디테일한데, 현실과 괴리된 느낌? 낭만적 퇴폐주의같기도 하고, 괜히 혼자 폼잡는거같아. 슬픔도 낭만도 너무 소설적이랄까. 진실성이 안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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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단단한 철학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이라고 말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도
일종의 간접경험이므로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여행도 많이 하라고.
어렵다.
일도, 작업도, 연애도.
모든 것이 왜 이렇게 어렵지.
어렸을 땐 쉬웠는데.
그냥 좋아하는 것 마음껏 보고,
그리고,
표현하고,
사랑하고,
많이 웃고,
신나게 놀고,
행복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