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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oprlej Jul 22. 2019

18


한 때,
나는 누군가의 작은 구원이었다.
그를 삼키려는 커다랗고 두려운 무엇으로부터
난 그를 지켜주는 바다였고,
튼튼한 배였고,
반짝이던 별이자 파도였다.


자라나는 의심들은
점점 우릴 가난하고 퇴색하게 했다.
전하지 못한 편지는
여전히 고이 접힌 채 어지러운 내 서랍 속에.
잊혀질때쯤 찾았던 그 카페엔
그가 쓴 쪽지도 늘 같은 자리에.
함께 좋아하던 영화.
음악.
떼어내도 없어지지 않는 선명한 자국들.
나도 모르게 스며든 같은 습관들.
사소한 말버릇.
취향.
가치관.
어떤 냄새.
그리고
하루아침에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그 공간.


....안돼.
벌써 미화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끔찍했는데.
얼마나 잔인했는데.

함께 좋아했던 겨울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않는다.
어쩌다 눈 오면 예쁜 계절.
오들오들 몸을 떨며 웅크리는게 왠지 시린 계절.
재난같이 추운 계절.
그냥 그뿐.
난 이제 거짓말처럼 싫어했던 여름밤이 좋아졌고,
네가 모르는 어떤 낯선 향기를 풍기고,
마지막 그 전화를 받아 내기엔
이미 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걸 알았고,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을 외면하는 것을,
난 꽤 잘 해내는 사람이 됐다.
제대로 씹어내고 뱉은 뒤,
널 보냈다.

이젠 뭐든 날 좀 내버려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멋대로 다가왔다가 홀연히 사라지거나,
혹은 나로 하여금 사라지게 만들거나,
시간이 지나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기대들은 어차피 모순뿐이고, 모호한 관계들의 끝엔 상처밖엔 남지 않는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건 확신뿐이다.

어쨌든 기대했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난 늘 그랬듯 오늘도
내 자존심을 지키는게 가장 중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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