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성동 계곡에서
인왕제색도 모사본이라도 벽에 걸고
겸재처럼 초당에 앉아
망건 쓰고 바람 잘 통하는
삼베 모시옷 입고
기린교 아래 흘러내리는 계곡 물소리 들으며
천 년의 숨 들이쉬고 내쉬련다
아이는 탁주 두 되 받으러 도가에 심부름 가고
머리 허연 아내는
파전이라고 부치는지 부엌에서 부스럭거리고
비 갠 인왕산에 흘러내리는 안개
안개에 덮이는 세상
호랑이가 출몰하던 이 골짜기
무계정사의 비해당에서
꿈에 본 무릉도원을 그리워하던
안평대군의 몽롱한 눈빛을 닮아볼까나
저잣거리에 숨은 사람들
오래 살아남을 사람들
복개된 하천들 속에 스며든 옛 다리며
무너진 주춧돌들이며
부서진 마음들이여 오늘은 나도
수성동 계곡 물소리 들으며
아련한 눈으로
구름이 벗겨진 인왕산을 바라보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