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초상화

- 영화 <아이리시맨>과 드라마 <소년의 시간>

by 차거운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은 적이 있다. 젊음의 환희와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 한 청년의 매력적인 모습을 화가가 초상으로 그렸다. 주인공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서 아폴론에게 영생을 요구했던 무녀처럼 자신의 젊음이 영원히 아름답게 유지되고 늙음의 운명은 초상화가 지도록 기원하고 이것이 현실이 된다. 어쩌면 이는 <파우스트 박사>의 전설처럼 악마와 영혼을 두고 거래를 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에 대한 비유인지도 모르겠다. 살인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배신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초상화는 흉하게 변하고 결국 초상화를 찢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목숨을 잃게 된다. 초상화와 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 기괴한 상상력과 다소 오싹한 인간의 심리적 어둠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성찰의 자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영화 <아이리시맨>은 트럭노조에 속한 운전 노동자가 자신이 운송하는 화물인 고기를 빼돌리는 일탈을 계기로 조금씩 범죄라는 인간 사회의 어두운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쩌면 가난 때문에 조금의 수입을 더 얻기 위해 시작한 잘못이 바늘 도둑 소도둑 된다고 하듯 점점 문제가 확산되고 심화되는 상황에서 범죄 집단의 유혹에 취약한 상태가 되어가는 것이다. 자신을 딸을 함부로 했다는 가게 주인에게 찾아가 딸이 보는 앞에서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든든한 아버지가 아니라 감정을 폭발시키는 두려운 사람으로 딸의 마음에 각인되는 계기가 된다.

갱 조직의 주변에서 처음에는 미숙한 모습을 보이던 그의 존재가 사람을 살해하는 경험을 통해 전문적인 페인트공(청부 살해자)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비슷한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행하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등 가족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삶을 선택하지만 두려움이 가족 구성원들의 소통을 막게 된다. 전미 트럭노조 위원장의 측근으로 마피아 조직의 파견을 받아 활동하면서 위원장의 호의와 신뢰를 얻게 되지만 위원장이 여러 가지 비리 등으로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나온 후 재기를 위해서 움직이는 과정에서 조직과 갈등을 벌이게 되고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음에도 조직의 지시에 의해 위원장을 살해한다.

세월은 흐르고 조직의 구성원들도 죽거나 늙어가고 남자는 요양원에서 홀로 늙어가며 죽음을 기다린다. 연방요원의 자백 권유에도 과거의 일들에 대해 그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사제의 방문과 기도, 삶의 성찰 권유에도 그의 영혼의 검은 얼룩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고백하거나 회개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생명이 없는 죽음의 어둠 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최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비록 피 묻은 밥을 위해서 시작되었든 아니면 영원한 젊음 또는 생명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위한 타협이었든 간에 말이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는 음악적 성취에 대한 욕망이 그 거래 대상이었음을 알게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능력이 아닌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 얻고자 할 때 대가로 내놓아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일 것이다.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13살 소년이 저지른 또래 소녀를 대상으로 한 잔인한 살해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런 행위를 선택한 이유를 찾고자 하는 과정과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상황을 다면적으로 제시하는 작품이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사회적 플랫폼들이 갖고 있는 오용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로 치면 촉법소년에 해당되는 연령의 소년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전문가의 노력은 좌절로 끝나버린다.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인과론적 분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전물리학이 현대 양자물리학의 세계로 전환된 것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카오스적 혼돈과 부분적 규칙성의 혼재 속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가족의 영향일까 학교 또래 집단의 영향력에 휘둘린 것일까 게임과 컴퓨터의 가상 세계 속에서 빚어지는 현실감 결여의 탓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조숙한 성적 욕구의 좌절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심리 상담가와 마지막 장면에서 나누는 대화는 마치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의 높은 지능과 능란한 답변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누가 저 소년에게 저런 영악한 처세술을 전수한 것일까.

인간의 변화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초래한 다양한 심급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들을 온전히 인정하고 이해한 뒤에 이를 후회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법망을 피하거나 처벌의 수위를 최소한으로 낮추는 것이 현명한 대응이 된다. 거기에는 윤리적인 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윤리적 죄의식은 인간의 법적 처벌보다 더 깊은 차원을 건드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이면서 고리대금업자가 사회적 기생충이어서 척결되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논리와 신념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내면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붕괴되어 간다. 그런데 영화 <아이리시맨>이나 <소년의 시간>의 주인공들에게는 자신의 행위로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역지사지의 능력이 마모되었거나 부재한 것으로 비친다. 죽은 소녀의 가족이나 소녀의 내면에 대한 언급은 <소년의 시간>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아이리시맨>의 경우도 비슷하다. 모든 행위의 동기는 범죄를 저지른 주체의 관점에서 제시될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핵심적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서 행동을 평가하는 기준점으로 제시된 사회적 시선이라는 기준점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존 롤스가 그의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에 싸인 입법자가 모든 선입관을 배제하고 입법을 하는 그런 시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오로지 자신이 현재 발 딛고 선 지점에서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들은 객관적 기표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재정의되고 있으며 전쟁과 타인에 대한 혐오와 배척의 욕구도 그런 주관성의 차원에서 평가될 뿐이다. 공론의 장은 약화되고 있으며 국제기구는 무력화되고 있고 규범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세상이 되었다. 마치 '우리가 노래를 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다'라고 장터에서 떠든다고 한 성서의 말씀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말들은 서로를 연결하지 못하고 타인의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감수성은 메말라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 여전히 희망은 있다. 나는 최근에 가톨릭에서 21세기의 젊은 성인으로 시성 된 아쿠티스를 생각하고 있다. 15년을 살았던 인물이 이토록 빠른 시간에 성인품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눌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고 인터넷 미디어를 활용해서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선의를 갖고 움직인 젊은이인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이 13살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는 개인의 도덕성이나 윤리적인 감수성이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지 고민하게 한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 맨 처음에 두 갈래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제곱으로 갈라지는 그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삶과 죽음, 선과 악, 선의와 악의, 공감과 배제의 원리가 드러난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사람의 초상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점점 흉해지는 초상이 있고 점점 맑고 투명하게 아름다워지는 초상이 있다. 그렇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있다. 화장품을 통해서 아름다워지는 길도 있겠지만 유한한 것이 영원한 것을 이길 수는 없다. 영원한 것을 지향하기를 우리 모두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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