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나들이를 마치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시차 적응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11월 내내 그런 시간을 보냈다. 음식에 대한 적응과 수면의 질이 우선 제 궤도를 찾아가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이런 과도기를 잘 넘기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여행 관련한 정보가 담긴 책 몇 권을 읽고 반납한 뒤에 이병률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와 채호기 시집 <손가락이 뜨겁다>,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와 세 권으로 된 <연암집>을 빌려다가 읽었다. 시들은 각 시인의 지문과도 같은 언어들로 기록되는 법이어서 저마다의 음조를 띤 노래가 되기 마련이다. 허수경 시인은 독일에 건너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의 기억이 새롭다. 이병률의 시를 좋아하는 후배 교사가 떠올라서 찬찬히 읽어 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글을 평가할 입장은 못 되니 그저 읽을 뿐이다. 모든 글에는 자기만의 역사와 서정이 있기에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철저하지 못한 그런 독자일 뿐이다.
<연암집>을 흥미롭게 읽었다. '방경각외전'에 실린 산문들은 한문 소설로 간주되어 학습자료가 되었기에 친숙하고 개인적인 글들과 묘갈문, 행장, 서간, 시 등이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많고 새롭게 보는 것도 많아서 몰입이 되는 읽기 과정이었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전체적으로 기행문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을 터이니 1780년의 그의 나이는 대략 43세 전후가 되겠지. 삼종형을 따라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국경을 넘어간 그의 흥분됨과 관찰력과 필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그런 글이고 거기에 새로운 것 낯선 것에 대한 감흥이 더해져 <호질>, <허생전>의 풍자와 비판적 인식도 담기게 되었을 것이리라. 그래서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의 필요를 야기시킨 원흉으로 지목되어 반성의 글과 성찰을 요구받게 되었으리라. 그렇지만 그 방식이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글을 통해 음미하게 된다. 연암은 사실 노론 계열의 주류에 속한 가문 출신으로 사회적으로 그늘진 삶을 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 생각이 담긴 글들에서 그런 기미를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서얼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남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천군수로서 재직할 때 이존창이라는 서학교도에 대한 판단이나 글에 드러난 태도는 당시 지배계층의 관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수구적인 성리학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를 생각해 볼 뿐이다. 그의 손자가 박규수라는 점도 떠올리면서 말이다. 적어도 <연암집>을 읽으면서 모든 것을 그의 시각대로 따라가서도 안 되겠지만 그가 자신의 주관을 뚜렷하게 갖고 살아간 문사이자 관료였고 사회적 주류에 속한 사대부라는 점을 기억하고 인정할 필요는 있겠다. 그런 사람들은 나름대로 매력적인 존재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다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알다시피 다산의 경우는 남인 계열에 속한 집안에서 자랐고 문재가 연암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인물이기에 그러하고 서학 즉 천주교의 전파와 관련하여 그 행로가 또 다른 면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연암의 <열하일기>가 일종의 연행록이라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연행록은 하나의 장르에 해당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게 중국을 다녀오는 사신들과 일행들 속에서 누구는 서양의 문물과 도구를 보고 또 다른 누구는 서학을 발견한 것이기에 말이다. 한국의 천주교 전래의 특이함은 누구나 인정하듯 선교사에 의해서 의지적으로 전파된 것이 아니라 천진암 강학과 같이 중국을 매개로 해서 서구의 서적과 인물과 접촉한 결과를 국내에서 소화하는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다. 가성직제도와 같은 과도기적 문제도 그렇게 생긴 것이고 이승훈의 세례 후에 제사 금지 지침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이 초기 사대부 계층의 이탈과 최초의 순교로 이어지는 것도 그런 맥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과 사도 세자의 비참한 죽음이 낳은 비극이 있고 우여곡절 끝에 세손으로 왕위 계승을 한 정조의 삶이 연암이나 다산과도 연결된다는 점, 그리고 서학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을 맺는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만천명월주인공'이라고 스스로를 자부하던 정조의 모습은 문체반정의 보수성을 보여주면서도 연암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무부무군의 서학이라는 공격의 칼날 앞에 선 다산을 금정찰방으로 좌천시키는 모양새로 보호하는 모습 등을 통해 인재를 아끼고 극단적인 정쟁을 유발하지 않으려는 탕평의 군주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집안은 맏형 정약현을 제외하고 정약종은 처형되고 다산과 정약전은 유배의 고난 속에 시련에 처하게 된다. 황사영과 정난주 그 밖의 많은 사연이 얽히고섥혀 있어서 거의 쑥대밭이 된 집안과 교우관계 속에서 다산은 살아남아 <여유당전서>로 남게 되는 수많은 저작들을 남기게 된다. 그 글들 속에서 우리는 다산의 마음을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다산이 살아남아 쓰고자 했던 글을 생각한다. 그리고 연암이 자신의 생애를 두고 써 나갔던 글들을 생각한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을 쓰고 또 쓰고 주변의 사랑하던 사람들의 비명과 행장과 함께 조선시에 대한 자각을 드러내는 글들을 남겼다. 그는 특히 다방면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들을 시와 산문과 유교적 경전의 현실적 적용을 구상하는 경세의 글들 속에 아로새겼다. 연암도 역시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남겼다. 그들은 서로 직접적 교류를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서로의 주장도 알고 있었다는 간접적 정황이 글과 주석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 생각해 본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가는 그 과정을 일생이라고 하고 누구나 그 삶의 시간에 대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행을 하든 책을 읽든 밥벌이를 위해 일을 하든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와 말과 몸짓에는 그런 의도가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시대의 흐름 앞에 어떤 몸짓과 표정과 말을 해야 할지 두려울 때가 있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성실함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살아야 한다. 다산과 연암이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 직접적으로 손을 잡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그들은 그들이 남긴 언어들을 통해서 서로 넘나들었던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거기에 정조의 모습도 겹쳐 보인다. 군주와 신하 된 자로서의 그 지음의 시간도 말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던 정조는 좋은 임금이 되기를 원했다. 연암도 다산도 그렇지 않았을까. 우리는 괴테의 말대로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자식이다. 자신의 시대에 보답하는 자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