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스페인의 왕궁에서
나는 조선의 궁궐과 종묘와 사직단과 능묘들을 떠올린다
천 년의 도시 경주의 왕릉도
그런데 평양과 개성의 궁터에 가본 적이 없으니
나의 역사적 지식은 단절되어 있다 분단된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인식적 한계는
로마의 켜켜이 쌓인 유적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무덤 위의 소꿉놀이 같다는 생각
사람 사는 세상의 힘의 역학은 물리법칙과도 같다는 생각
돌도끼의 시대를 지나
청동기와 철기를 지나
원자력과 레이저의 시대를 지나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
수없이 잘린 단두대의 머리들과
효수된 역적들의 회칠한 얼굴들과
새가슴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민초들의 표정을 떠올리다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비어 있는 그릇의 공간이
세상을 이끌어 왔음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