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선생, 남유럽 3개국 여행일기

- 2025년 11월 10일 월요일(마드리드 2일 차)

by 차거운

내일 11일이면 이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야 하니 실질적으로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마드리드에서 보아야 할 것이 많겠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한다. 조식을 간단히 먹고 솔 광장이라는 곳으로 걸어갔더니 여행 안내서에 소개된 배고픈 곰 동상이 거기 있었다. 바르셀로나도 그렇지만 이제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이 광장에도 우리의 시청 광장처럼 성탄 트리가 설치되고 있는 중이었다. 배고픈 곰 동상에 새겨진 1967이라는 연도가 나와 깊게 연결되는 느낌을 준다. 나의 출생 연도라는 점에서 말이다. 내친김에 우리는 표를 예매하지는 못했지만 아침 줄 서기가 대부분 성공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라도 미술관으로 걸어가서 줄을 서서 표를 잘 구입했다. 여기는 우피치 미술관처럼 그렇게 어마무시하게 사람이 몰리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니 미술관 안의 관람객이 점점 눈에 띄게 늘어나기는 했다. 그래서 부지런을 떠는 것은 여행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오디오 안내 기기를 하나 신청해서 아내가 듣도록 하고 나는 그냥 보기로 했다. 미술에 관해서 깊이 알지 못하니 곰브리치의 미술사나 집에 있는 명화 도록에 나오는 유명한 작품을 몇 개만 눈으로 보고 가도 남는 장사려니 하는 그런 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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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본전을 뽑아보겠다고 세 시간을 넘게 찬찬히 보다 보니 나보다 아내가 지치는 것 같아서 마무리를 하고 나왔다. 미술관 내에서 본 그림 중에서 벨라스케스의 그 유명한 ‘시녀들’이라는 작품이 있었고 또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그리고 ‘옷을 입은 마야’, ‘옷을 벗은 마야’ 두 그림은 비교하듯 나란히 걸려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프라도 미술관의 뛰어난 미술 작품에 대해서는 나의 무지함을 용서하기 바란다. 미술관 초입에 사진을 찍는 것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에 따라 사진을 찍지 않았기에 기억을 하려면 미술 관련 서적을 사서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피치나 도리아 팜필리아 미술관 같은 곳은 사진으로 찍은 것이 있어서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맥락을 모르면 그 또한 그냥 사진일 뿐이다. 좀 더 열심히 그림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오다가 허기가 져서 서브웨이 매장에 들러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었는데 이런 매장이 출입하는 사람이 자유롭다 보니 종이컵을 들고 돌면서 적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몇 차례 들어왔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지라 노숙자도 보았고 성당 주변, 특히 산티아고 대성당 주변에서 많이 보았는데 적선을 바라는 사람들의 손길이 자꾸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현금이 별로 없고 지폐가 10유로 이상인 것만 있어서 갑부가 아니니 그걸 그대로 주기도 그래서 심리적 갈등이 소소하게 있었다. 유럽의 화폐는 5유로부터는 지폐고 2유로 이하는 동전이다. 1유로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성당 헌금도 많이들 동전으로 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산티아고 공항에서 일부러 10유로를 동전으로 바꿨는데 막상 바꾸니 쓸 일이 없긴 했다. 모든 것은 웬만하면 카드로 다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온 사람에게는 1유로를 주었는데 곧바로 다른 사람이 또 들어와서 종이컵을 내미니 마음이 살짝 불편해서 거절했다. 그리고 찬찬히 생각해 보니 제 이웃이 저에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베드로 사도의 물음에 답하신 주님 말씀이 마음을 때린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말씀 말이다. 겨우 한 번 주었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다니. 참으로 못난 마음이다.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라는 책도 생각이 난다. 우리의 논리는 자본의 합리성을 초월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잊지 말아야 한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재화가 돈으로 거래되는 재화보다 사실은 더 충만하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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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길을 떠나 마드리드 왕궁으로 걸어갔다. 왕궁 근처의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이 노래를 참 잘한다. 그리고 데보드 신전에 입장할 수는 없었으나 외관을 보면서 근처 공원에서 저녁 해가 내려앉는 광경을 보았다. 이제 날이 저물고 있다. 내일이면 바라하스 공항에서 인천행 캐세이 항공편을 타고 떠나야 하니 실질적으로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된다. 자유여행의 방식으로 떠난 처음인 이 여정의 여운이 지금은 몰라도 돌아간 뒤에까지 오래 남을 것 같다. 경제적인 여유가 많지 않은 편이어서 다시 여행을 하려면 쉽지만은 않을 것인데 그래도 처형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성지 순례와 여행을 겸한 알찬 일정을 보냈고 우리 둘이서 스페인 포르투갈의 7개 도시를 돌면서 보낸 여정도 많은 체험과 깨달음과 각성의 시간이었다. 희망의 희년 순례임을 잊지 않고 성당에서 화살기도를 드리면서 그저 유희와 도락의 여정이 되지 않도록 희망했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할 기억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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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숙소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는 일이 남았다. 제대로 입에 맞는 한식을 먹지 못한 기억 때문에 집사람이 한국식당에 가는 것을 반대해서 베트남 쌀국숫집에 가기로 했다. 쌀국수는 국내에서도 자주 먹었으니 입맛에 맞을 것 같았는데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쌀국수 하나씩 먹었는데 아주 입에 착 감기는 맛이어서 만족스러웠다. 숙소에 오다가 대형마트가 근처에 있음을 알고 들어가서 구경도 한참 하고 선물로 초콜릿을 좀 사고 올리브유도 추가로 구입했다. 숙소에 들어가서 짐을 정리하고 아침 일찍 출발할 준비를 대강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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