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5월 23일 목요일
짐을 정리하고 숙소가 있는 천부 성당 영성센터를 향해 가면서 생각을 해보니 입실 시간이 최소한 오후 2시 이후가 될 터이니 그전까지 무엇을 하면서 보람 있게 보낼 것인가 헤아려 보게 된다. 그래서 일단 천부까지 가는 길에 마주하는 풍경들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뒤에서 급한 차가 있으면 먼저 가라고 양보하면서 중앙선을 넘어가 내 차를 추월하도록 종용(?) 하기도 한다. 울릉도는 빨리 갈 수 없는 곳이다. 곳곳이 절경이고 아찔한 절벽이라 간이 움찔움찔한다. 태하동이 왼쪽 아래 있음을 알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직진하여 현포를 거쳐 코끼리바위(공암), 송곳봉을 지나 추산을 거쳐 천부에서 나리분지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천부 숙소가 나리분지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이다 보니 나리분지에서 성인봉 등산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나리분지는 강원도의 고갯길 못잖은 난도를 보이며 차의 성능을 시험하는 듯하다. 나리분지 야영장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인봉을 등산할 준비를 하고 가다 보니 길을 되짚어 오는 부부를 만났다. 성인봉을 목표로 하는데 이 길은 용출소와 해담길 5-1, 5-2길에 해당해서 아닌 것 같다며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더 많은 체류의 결과로 얻은 깨달음이기는 하다. 이날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셈이다. 앞서 되돌아간 부부를 따라 이야기를 나눈 후 나리 삼거리를 지나 숲길 안내센터에 갔더니 거기서도 또 한 쌍이 비슷한 상황에서 헛걸음을 하고 되돌아서고 있었다. 듣자니 성인봉으로 가는 다른 등산로는 공사로 막혔고 나리분지에서 갈 수 있는 것은 장재를 거쳐 공군 레이더기지를 돌아가는 길이 현재로서는 유일하단다.
그래서 우리 세 쌍의 부부가 본의 아니게 장재를 통해 성인봉을 오르는 등산팀을 이루게 되었다. 물론 서로 거리를 두고 편안하게 가는 것이 좋겠기에 속도 조절을 하면서 올라가는데 상당히 가파르게 올라간다. 치악산 사다리병창길 올라서는 느낌과 비슷하다. 집사람이 비염과 감기로 이번 울릉도에서는 몸이 최상의 상태가 아닌 까닭에 가끔가끔 쉬면서 새우깡도 먹고 다른 간식도 먹으며 장재를 넘어 공군시설을 우회해서 성인봉까지 가는 길이 전반적으로 3.8km가량 되는 것 같다. 도동 쪽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들의 거리도 대략 그 정도 거리이니 산을 넘어가면 7-8km를 등산하게 되는 셈이다.
성인봉에는 단체로 온 사람들이 꽤 많아 왁자지껄하게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는 조용하게 스텔스 모드로 다니는 사람들이니 활기차게 자기표현을 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 깜냥과 성격대로 살아야 하는 법. 전에 세 사람이 왔던 안갯속 산행에 비하면 날씨가 참으로 좋다. 이상하게 올봄에는 전반적으로 대기질 상황이 나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울릉도는 숨 쉴 맛이 나는 곳이다. 눈도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섬의 영역에 안겨 있으니 서두를 일도 별로 없다는 느낌이다. 섬을 한 바퀴 돌아도 한 시간 남짓이면 가능하니까 말이다. 물론 걸어서 말고 차를 이용할 때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차를 두고 왔으니 산 너머로 하산할 수는 없고 왔던 길을 되짚어갈 수밖에 없다. 다시 장재길을 거쳐 내려가는데 1944년인가 한 목사님이 목회를 위해 산을 넘었다가 눈에 갇혀 동사한 내용을 설명한 안내판이 서 있다. 일제강점기 말이니 그 당시 삶의 구절양장 같은 속이야기와 사연들은 이것 말고도 우리의 온 산하를 뒤덮고 있을 것만 같다. 저 독도의 멸종에 가깝게 사라진 강치(가지어)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수난을 당한 존재와 생명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우리 눈이 그것을 볼 수 있는 심안이 있다면 현재도 도처에서 핍박당하며 울부짖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공감의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
산을 내려오다가 널찍하게 자리 잡은 나리촌 식당에 지친 몸으로 앉아 산채정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16개의 접시에 담긴 나물들이 풍성한 시각적 효과를 준다. 아카시아꽃 절임, 명이나물, 취나물 등등 설명을 들어도 나 같은 문외한은 즉시 잊어먹고 만다. 절임과 무침으로 중복되는 나물도 있지만 더덕은 특히 맛있다. 집사람이 도동에서 더덕을 사고 싶어 했는데 아직 구입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먹으니 좋다. 가격은 싸지 않다. 1인 25,000원 두 사람이 5만 원이니 한 끼 식사비로는 적지 않은 비용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외식 물가 상승을 고려할지라도 전반적으로 울릉도 물가는 육지에 비해 다소 비싼 편이다. 울릉도의 물류 흐름이 예전 같지 않고 좋아졌다지만 내가 모르는 측면이 있는 모양이다. 섬이라는 환경이 갖는 특수성이 있겠지.
주차해 둔 곳으로 복귀해서 신발을 갈아 신고 나리분지를 떠나 천부 마을로 내려왔다. 좁은 골목에서 헤매다가 영성센터와 성당에 차량이 드나드는 통로를 알아내고 진입하여 주차장에 차를 대니 마음이 편안하다. 울릉도에서 차를 주차장에 제대로 댈 수 있는 것은 마치 차고지를 확보한 것처럼 푸근한 느낌을 준다. 숙소 주변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숙소인 영성센터 아래편으로 성당과 강당 사제관 등이 있는 건물이 있다. 숙소는 잘 지어졌고 목적에 부합하게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가 있는 전망대에서 천부 앞바다를 조망한 풍경이 일품이다. 마치 그리스의 어느 섬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영성센터 관리장님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서 시설 사용과 관련한 안내 사항과 기타 주의 사항을 전달받고 공용 식당 냉장고에 3일째 싣고 다니던 식료품과 음식물을 냉장고에 정리해서 넣었다. 28명 가까운 단체가 오전에 빠져나간 뒤라 다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숙소에 오늘 하루는 우리밖에 없단다. 방은 101호이고 방은 1칸에 욕실이 딸려 있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