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 인공지능 시대의 삶과 노래

by 차거운
시인은 시를 근심할 뿐이다
정치를 근심한 이후에도
정치는 저희들의 똥을 뭉개고 저희들끼리 헹가래를 친다
시인은 정치를 근심하기 이전에 이미 정치가이므로
시를 근심할 뿐이다
- 장석남,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일부


시인은 시를 근심하고 정치가는 저희들끼리 헹가래를 치고 자신들의 길을 간다. 환자는 자신의 병을 근심하고 장사꾼은 장사를 걱정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자신의 삶을 근심하고 살아간다. 저 옛날 구약시대의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에도 사람들은 다가올 재난을 생각하지 않고 혹은 못하고 시집가고 장가들며 그렇게 일상을 살아갔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가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은 저 물속으로 잠겼다. 물로 씻은 듯이 과거는 사라지고 방주 속의 노아 일족과 짐승들이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무지개가 걸렸다. 새로운 출발. 인류의 갱신. 지금의 시간까지 오랜 시간이 흐른다.

영화 <아무르>를 보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의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하다. 집에는 그들이 함께 살아온 시간의 기억들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다. 어느 순간 아내의 얼굴에서 의식이 사라지고 끊어질 듯 명멸하는 전구처럼 돌아왔다간 다시 흩어지기 시작한다. 남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린다. 아내는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고 육체의 자기 관리 능력이 사라져 간다. 소변을 지리고 휠체어가 등장하고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된 제자나 딸의 방문 앞에서 그러한 상황을 보여주기가 참담하다. 아내는 병원으로 요양소로 자신을 보내지 말라고 남편에게 다짐을 받는다. 육체의 붕괴와 정신의 이탈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앗아간다. 아내는 간곳없고 누추한 허물만 남은 듯하다. 늙고 병든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을 견딘다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 김훈의 <화장>이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소멸 앞에 선 인간의 쓸쓸함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한강의 소설집 <여수의 사랑>과 <노랑무늬영원>을 읽었다. <여수의 사랑>은 한강의 초기 단편들을 묶어 놓은 것으로 거기 실린 단편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나의 감정을 해설을 쓴 김병익의 글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짚어내는 것을 확인하면서 사람의 생각은 비슷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한강의 소설적 출발의 풍경이 한 세대 이전인 60-70년대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언급이 바로 그것인데 아주 적확한 평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랑무늬영원’에서는 한강의 소설적 문체가 그 이후의 작품들과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2인칭으로 서술하는 작품의 경우가 그런 느낌을 선명하게 주었더랬다. <소년이 온다>라든가 <작별하지 않는다>의 그것과도 그리 멀리 느껴지질 않는 것으로 보아 자기만의 호흡을 찾아가는 단계로 읽혔다. 시적이고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도 그렇고.

장석남의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와 이승원의 시집 <어둠과 설탕>을 읽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함께 생활하다 보면 성격적인 유형이랄까 아이들의 모습이 드러내는 개성이 범주화되어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정한 역할놀이 같은 것처럼 비슷한 유형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인데 시와 소설 등의 문학적 작품이나 작가의 전략에서도 그런 걸 느끼게 되곤 한다. 포스트모던적이고 해체적인 관점에서 시를 쓰는 시인들의 모습이 세대마다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모습도 신기할 정도로 그렇다. 이승원의 <어둠과 설탕>이 그런 느낌을 준다. 이에 비해 장석남의 시집은 시적인 화자의 독백과 정서가 비교적 순탄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개성이 서로 다른 시인들의 시들을 읽다 보면 다양한 꽃이 피어 있는 꽃밭을 보는 느낌이 들곤 한다. 문학적 유형론은 그래서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한다.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를 읽었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읽고 나서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인데 발간 시기가 2024년이라면 최근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인공지능이 전 세계의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이 시대의 기대와 불안감을 잘 짚어주고 있는 시의적절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인류의 삶에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까. 하라리의 말은 간결하면서도 명료하다. 이제까지의 상황과 달리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동적 도구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 학습 능력을 지니고 의식까지는 아닐지라도 지능을 가진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에 대해 인간이 충분히 대비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발 하라리는 고전적 계몽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민주적인 활력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유기적인 정보의 네트워크의 시대가 지나고 이제 유기적인 네트워크와 실리콘 네트워크의 공존, 나아가서 유기적 네트워크를 실리콘 네트워크가 대체할 위험을 인식하고 대비하자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의 말대로 미래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고 하겠지만 과연 우리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문제의 핵심은 다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지나간 역사의 잘못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관심사를 갖고 삶을 살아가지만 인간으로서 우리는 동시에 공동의 관심사를 지닐 수밖에 없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시야에만 갇혀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인류의 삶에 다가오는 위기에 대해서 유발 하라리가 예언자처럼 경고를 하는 것이라면 그 경고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노아 시대의 우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 있듯이 인간은 맑은 이성을 지닌 투명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욕망과 죄의식과 이기심과 무지가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심연도 공존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인간을 이상화하는 것도 혐오하는 것도 지혜롭게 피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한계를 직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야기들은 여전히 인간과 함께하고 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인간의 투사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세상의 이야기들은 많고 많으니까.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고 아름답고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지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여전히 이야기의 영향권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모든 의구심과 혼란과 흔들림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인간이 길을 잃지 않기를! 다시는 믿음의 이름으로 마녀사냥을 하지 않기를! 신의 이름으로 생명을 억압하지 않기를! 그리고 상실과 노쇠함과 비참한 절망감 속에서도 희망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기를! 하라리의 말대로 미래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나 역시 믿는다. 모든 좋은 것을 다 시험해 보고 마음에 간직하기를. 고통이든 기쁨이든 내게 주어진 이 삶이라는 잔에 담긴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모두 마실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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