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 희망의 후손들
탕 임금의 세숫대야에 새겨진 '日新又日新'에 대해서 가끔 아니 종종 생각해 본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아진 내일의 삶에 대해서 기대하면서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이 담긴 말이겠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삶이 되는 것일까? 이는 매일 갱신되어야 할 삶의 내용들을 가늠할 평가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좋은 삶과 덕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살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붙잡을 수 있을까?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어린아이는 소년기를 거쳐 청년의 들끓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통과하여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무덤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코헬릿의 탄식처럼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일까. 참으로 수유와도 같은 인생이다.
또 한 가지 마음에 계속 담아 두고 살아가는 구절이 있으니 공자의 이른바 '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이다. 사실 사람이 언제 죽을지는 스스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일 것이다. 언제라도 훌훌 털고 생과 이별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산다면 이는 가히 깨달은 자요 자유인이거나 아니면 생각할 줄 모르는 즉자적인 존재이든가 어느 하나이리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 중의 하나인 죽음의 치명적인 독침이 무해하거나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어떤 조건일 때 가능할까. 공자가 듣고자 한 '도'는 어떤 종류의 깨달음이나 지식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전 생애를 걸고 이 문제와 직면하고 싶은 심정이다.
전임 교종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탁월한 신학자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회칙의 구절들은 명쾌하고 날카롭게 인간 구원의 실천적 이념과 철학들의 한계와 역사적 실패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 느낌이다. 결국 모든 것은 출발점인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과 자기 인식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성과 합리의 근대적 기획들에게 묻기를 인간은 자유로운가? 인간은 맑고 투명하며 온전히 이성적인가? 그 안에 어둠과 한계와 이기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한 대가로 우리가 이미 겪고 확인한 역사적인 재난과 황폐함을 초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인간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이 세계의 불완전함과 악과 고통을 스스로 온전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겸허한 자기 고백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선택적 자유를 부정하지 않되 그 선택이 온전함을 가지려면 올바른 길 위에 서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교적 믿음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신의 사랑이 이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희망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아브라함을 떠올린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는 신에게 응답했다. 그리고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후손을 갖게 되리라는 약속을 믿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믿음 안에서 말이다. 여기서 유럽 문화권에서 성장하고 2차 대전의 화염 속에서 그을리며 생을 마감한 두 유대 여성을 기억하고 싶다. 에디트 슈타인과 시몬 베유가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학문적인 역량이 뛰어난 철학자이며 교육자이기도 하고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이끌렸으며 그러한 과정이 저작 속에 진솔하게 남아 진리를 찾아 용감하게 나아가는 삶의 모범으로 감동을 준다는 점이 그렇다. 에디트 슈타인은 갈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살다가 나치 정권에 의해서 네덜란드의 수녀원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가스실과 화장터를 거쳐 수많은 유다 동족과 함께 희생자의 명단에 올랐다. 시몬 베유는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있던 영국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가톨릭 신앙에 다다랐으나 교회법적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유보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례에 대한 그녀의 망설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에디트 슈타인은 갈멜 수녀로서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희생을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을 연결하는 차원의 십자가 희생의 차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그녀는 가톨릭의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생의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최후의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결코 쉴 수도 중단할 수도 없는 모든 것을 건 탐색의 여정인 것이다.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제 영혼 찹찹하지 않사옵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갈급한 것이다. 중력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위로받을 길이 없다. 나치 정권과 같은 파괴적인 사회적 권력의 폭력과 개별적인 인간 안에 있는 도사리고 있는 윤리적인 악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어둠을 걷어내는 일에는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적 기획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안다. 시몬 베유가 인정한 것도 에디트 슈타인 성녀가 주어진 고통을 능동적인 희생으로 십자가의 그것과 결합시킨 것도 그러한 것이라고 믿는다.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희망을 간직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이 어둠이 짙게 드리워진 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전쟁과 갈등과 대립이 우정과 협력과 호혜의 자리를 대신하고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다. 특히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걸어가는 행보는 세상을 점점 냉혹한 정글의 논리와 대중의 비루한 이기적인 욕망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무기 생산을 위해서 쓰이는 돈이 사람들의 삶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가난하게 하고 있다. 유대인 대신에 또 다른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번져가는 배타적인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진리를 목마르게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꺼지지 않고 횃불처럼 타오르는 영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이 따듯해지고 위안이 된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과 시몬 베유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 기억에 의존해서 쓴 것이기에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인용한 것은 아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