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칩을 기다리며
봄이다. 입춘과 우수는 진작에 지났고 경칩을 앞두고 있다. 시골집이라면 대문에 붙어 나른하게 바람결에 흔들리는 '입춘대길'이라는 글자를 볼 수도 있겠지. 지난해 12월부터 지난 2월까지 3개월에 걸쳐 거의 동안거에 든 스님들처럼 묵언(?) 수행까지는 아니고 숨만 쉬면서 그렇게 보냈구나. 지구 온난화라는 말을 수시로 듣지만 그래도 겨울은 제법 추웠고 인제의 산천어 축제는 인산인해를 이룬 채 성황리에 치러졌다고 풍문으로 들었다. 놀라운 일들이 종종 전해진 그런 날들이었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이 체포되어 미국으로 압송되었고 베네수엘라의 권력 작동 방식은 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핵협상을 매개로 한 압박과 협상의 얽힘 속에서 이란에 대한 집중적인 군사적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 37년이라는 장기간 이란의 신정체제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과 지도부 상당수가 죽음을 당했다. 중동은 현재 불확실한 상황 전개에 휩싸여 있다. 어떻게,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수습될지 알기 어렵다. 중동의 허브 공항들을 경유하여 유럽으로 이어지는 항공편들이 대란을 맞고 있다. 죽은 이들과 죽음의 위험 아래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적과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여 연민과 애도를 표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을 쥐어 본 적도 없고 항상 그 권력으로 빚어지는 결정들에 의해 초래되는 결과들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민초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지상의 권력도 언젠가를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떠올리는 말씀처럼 '인간아, 너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지어다.', '메멘토 모리'라는 운명 앞에 서 있음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더 나은 길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4월 중순까지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영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일은 서로 맞물려 있다.
시집 몇 권을 읽으면서 한 사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그 목소리가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신경림 시인의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통해서도 그렇고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를 통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은 여러 권의 시집을 발간했고 시작의 이력이 오랜 시인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이십 대의 목소리로 문학적으로 영원히 박제된 윤동주나 랭보나 이상이나 바이런의 경우를 생각하고 오랜 연륜을 지닌 채 여전히 시를 창작하다가 세상을 떠나간 시인의 이름을 떠올리면 또 그렇다. 신경림 시인이야 교과서를 통해서라도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 분이기에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시집이 되는 윤중호의 <고향 길>과 같은 시집의 시들 속에서 나타나는 시구에서 어떤 기미를 예감하는 일은 죽음의 소식 이후에 회고적으로 반추하지 않더라도 있을 수 있는 독해이리라. 허수경 시인은 저 독일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말을 떠올려 보건대 '새가 장차 죽으려 하매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하매 그 말이 선하다.'라는 진술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긴 겨울 동안 너무 숨만 쉬고 살았다. 이제는 이 삐걱거리는 몸뚱어리를 움직여 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 바깥의 온도에 맞춰 자신의 신체 대사를 동결하고 한 겨울을 버틴 개구리가 이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신체의 활력을 높여 얼어붙은 세포들을 녹이고 땅 위로 폴짝 뛰어나올 시간이 되었다. 나도 이제는 자리를 털고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개구리와 달리 바짝 마른 내 몸뚱어리는 아직 봄의 따스한 기운을 충분히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방이 없어서인가. 누군가는 <춘래불사춘>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맞이하는 경칩을 앞두고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일 주식시장은 요동치겠고 사회 각 분야마다 걱정도 많겠지만 아이들은 신학기를 시작하고 새로운 분위기에서 봄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도 기운을 내서 살아봐야겠다. 누군가의 시구절처럼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개구리 폴짝 뛰어나오니 나도 새 신을 신고 폴짝 뛰어봐야겠다.'
며칠 전에 본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대사처럼 '살아 있는 한 살아가라'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기로 하자. 골룸의 전설처럼 우리는 AI를 만들었다. 이것은 축복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프랑켄슈타인일까. 피지컬 AI와 인간의 증오와 적개심이 결합하면 어떤 전쟁이 또 전개될 수 있을까. 우리는 선의를 지니고 삶을 살아갈 만큼 자제력이 있는 존재일까. 우리가 자멸의 버튼을 누르게 된다면 부디 AI의 알고리즘에 의해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인간의 의지로 선택한 결과라면 신께서 심판을 하실 수 있을 테니까. 만일 알고리즘이 그 선택을 대신한다면 신은 알고리즘을 심판하실 수 있을까.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의 결정에 대한 처벌은 법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이 더 지혜로워져야 할 시간이다. 다가오는 봄에는 인간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따뜻한 날들이 되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면서 살기로 하자.